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로스트보이 출신으로 미국에 정착한 손 모지스 촐 씨의 세번째 이야기 입니다.
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 ‘나는 미국인입니다’. 안녕하세요? 김현숙입니다.
1980년대 초 수단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고아가 된 쏜 모지스 촐 씨는 1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아프리카 3개 나라를 떠도는 난민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00년 17살의 나이에 난민 신분으로 미국에 오게 됐는데요. 아프리카 초원을 누비던 소년이 미국에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전 기독교 루터교 단체를 통해 미국에 왔어요. 이 단체가 저를 후원해서 미시간주로 올 수 있었고 또 양부모님도 주선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잠시 양부모님 집에서 살다가 저를 집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저는 아프리카에 있을 때 가족과 함께 산 적이 없잖아요. 늘 또래 친구들과 의지하며 살았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사는 게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집에서 나와 난민 청소년들이 모여 사는 그룹홈이라는 곳으로 가게 됐습니다.”
촐 씨에겐 미국의 환경과 언어, 문화만큼이나 낯설었던 것이 바로 가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촐 씨를 유난히 아꼈던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본인의 집으로 들어와 살 것을 권유했고, 촐 씨는 결국 두 동생을 데리고 교장 선생님 집에 들어가 함께 살게 됐는데요. 양아버지가 되어주신 교장 선생님 덕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대학교에 다닐 때 교수님이 사회복지학을 더 공부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제가 좋은 사회복지사가 될 거라고 하시면서요. 교수님이 대학원 입학을 도와주시고 교내 일자리도 알아봐 주셔서 대학원 공부도 큰 어려움 없이 마칠 수 있었습니다. 2008년에 석사학위를 땄을 땐 미시간 지역 신문에 제 소식이 대문짝만하게 났어요.”
남수단 난민 소년 일명, ‘로스트보이’의 미국 대학원 졸업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지역에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회복지사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촐 씨는 잠시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자 미국의 수도 워싱턴DC를 찾게 됩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워싱턴DC에 있는 한 입양 관련 단체에서 인턴 그러니까 수습직원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DC에 온 김에 상원의원 사무실에서도 인턴 생활을 했죠. 그런데 한 친구가 워싱턴DC 정부에서 청소년 지원 업무를 담당할 직원을 찾고 있다는데 저 보고 지원해보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제 배경을 볼 때 그쪽 업무와 딱 맞을 것 같다면서요. 사실 저는 인턴생활을 마치면 미시간으로 돌아가서 기독교 신학 공부를 한 후 선교사로 나갈 생각이었거든요. 그래서 별 큰 기대 없이 DC 정부에 지원했습니다.”
촐 씨는 하지만 면접을 본 후 사흘 만에 연락을 받게 됩니다. 합격했다는 소식이었죠.
[녹취: 쏜 모지스 촐] “DC 정부로부터 합격 전화를 받았지만, 마음을 정하지 못해서 저를 후원하시던 분께 상담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당연히 DC로 가야 한다고 하셨죠. 하지만 전 당시에 넥타이 매는 법도 몰랐거든요. 변변한 정장 한 벌 없었고요. 그런 사정을 아셨던 그 후원자분이 저를 고급 옷 가게에 데려가셔서는 무려 4천 달러어치 양복과 넥타이를 사주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니까 엄청난 돈이죠. 그분은 제게 이제 석사 학위도 있고, 넥타이도 맬 수 있으니 DC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백인 사업가인 이 후원자는 촐 씨의 대학 학비를 대준 고마운 분이라고 하는데요. 촐 씨는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세 명의 은인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첫 번째 분은 저의 양아버지가 되신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입니다. 공부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주시고 많은 조언을 해주셨죠. 두 번째 분은 저를 위해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저를 신사로 만들어주신 사업가이시고요. 마지막 한 분은 은퇴한 의사 선생님이세요. 제가 학교 다닐 때 건강보험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병원에 갈 수 없었는데 제가 아플 때마다 이분께 전화를 하면 무슨 약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어떻게 건강 관리를 해야 하는지를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어요. 이 분 덕에 미시간에서 7년을 아무 탈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 세 명의 은인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거라는 촐 씨. 이렇게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촐 씨는 2008년 워싱턴 DC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저는 현재 DC 정부에서 사회복지사이자 청소년 상담 지원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직업교육을 담당하고 있고요. 또 청소년들이 좋은 직장을 갖도록 상담과 연구 등을 진행하는데요. 한마디로 아이들의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 도와주는 겁니다.”
미국의 청소년들은 상상도 하기 힘든, 험난한 청소년기를 보낸 촐 씨. 상담을 받는 청소년들은 촐 씨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요?
[녹취: 쏜 모지스 촐] “전 아이들에게 제 개인사는 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인터넷에서 저를 검색해 봤다며 경이로운 눈길로 쳐다보는 거예요. “촐 선생님,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더군요.”라고 말하는데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고생은 좀 했지만,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고, 지역 사회가 저를 도왔다고요. 저는 늘 청소년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거부하지 말고, 지역 사회를 향해 마음을 열라고 조언합니다.”
촐 씨의 이야기는 상담을 받는 청소년에게만 감동을 준 게 아닙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촐씨의 인생 여정이 실제로 영화로 제작돼 많은 사람을 찾아간 겁니다.
[녹취: 더 굿 라이 영화]
2014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더 굿 라이’, 좋은 거짓말. 할리우드 유명 여배우 리즈 위더스푼이 난민 소년들을 돕는 역할로 나오는 이 영화는 남수단 로스트보이 세 명의 미국 정착기를 담고 있는데요. 주인공 소년의 모델이 바로 촐 씨라고 합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더 굿라이’는 저와 제 형제들의 실제 경험을 담은 영화입니다. 지난 2003년, 작가와 영화 제작사들과의 첫 만남에 저도 참석했는데요. 영화 구상에서 실제로 제작되기까지 10년이 걸렸습니다. 영화이기 때문에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할리우드적인 요소가 담겨야 했거든요. 그래서 실제와 좀 다른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제가 경험했던 것들, 정서적인 부분까지 아주 잘 담아냈다고 생각합니다.”
촐 씨는 무엇보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로스트보이’를 알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또 영화가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저는 로스트보이 였던 사람이지만, 아직도 로스트보이로 살아가는 아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2011년에 남수단이 독립했을 때 정말 좋은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미국과 국제사회가 많은 도움을 줬거든요. 하지만 지금도 내부 난민은 4만 명에 달합니다. 내전이 계속되면서 너무나 많은 로스트보이, 로스트걸들이 생겨난 거죠. 제가 경험한 것들을 여전히 경험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이 남수단뿐 아니라 시리아와 소말리아, 북한 등 수많은 난민 어린이들의 고통을 생각하는 기회가 됐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네,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쏜 모지스 촐 씨의 세 번째 이야기와 함께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촐 씨의 또 다른 꿈이었던 기독교 목사가 된 촐 씨의 이야기 들어보려고 하는데요.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김현숙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