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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인입니다] 유일한 통역사, 로힝야 난민 하미둘 하산


로힝야어 통역사 하미둘 하산 씨가 미국 인디애나 주 포트웨인 시의 자택에서 VOA와 인터뷰하고 있다.
로힝야어 통역사 하미둘 하산 씨가 미국 인디애나 주 포트웨인 시의 자택에서 VOA와 인터뷰하고 있다.

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 ‘나는 미국인입니다’. 로힝야족 난민 출신 하미둘 하산 씨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디오] 유일한 통역사, 로힝야 난민 하미둘 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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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제적으로 가장 큰 사안이라면 ‘로힝야 사태’를 꼽을 수 있습니다.

[녹취: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

미얀마 당국이 이슬람교를 믿는 소수민족 ‘로힝야족’을 탄압하면서, 국제사회는 인종청소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죠. 최근 몇 달간 고향을 떠나 방글라데시로 건너간 로힝야족이 50만 명이 넘는다는데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미얀마에서 탈출한 로힝야 난민 중에는 미국을 오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미국인입니다’. 아쉽지만, 오늘이 마지막 시간인데요. 마지막 주인공은 다른 난민들보다 더 큰 주목을 받고는 있지만, 미국에서도 다른 난민들과 달리 훨씬 더 큰 장벽들을 마주하게 되는 난민들, 바로 로힝야족 출신의 이야기를 함께 하려고 합니다.

[녹취: 하산 씨 집]

인디애나주 포트웨인시의 조용한 주택가. 한 남성이 근사하게 차려 입고 집을 나섭니다. 선글라스 까지 쓰고, 능숙하게 운전대를 잡는 모습이 미국에서 꽤 오래 산 사람 같아 보이는데요. 이 사람은 바로 포트 웨인시의 유일한 영어, 로힝야어 통역사 하미둘 하산 씨입니다.

2015년 미국으로 온 하산 씨. 처음 미국 공항에 도착했을 땐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하산 씨는 로힝야 출신 난민들의 영어 통역을 하는 통역사로 유명합니다.

[녹취: 하미둘 하산] “저는 미얀마어 외에 5개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방글라데시어, 힌두어, 말레이시아어, 로힝야어 그리고 이제는 영어도 하게 됐죠. 저는 고향 미얀마에서 로힝야족으로 살면서 정체성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평생 신분증이나 여권을 가져본 적도 없고요. 종교적인 박해 때문에 신앙생활을 할 수도 없었죠. 여행도 갈 수 없었고, 정규 교육을 받을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오자마자 저의 정체성이 너무 뚜렷해졌어요. 영어 통역사라는 직업은 단순한 직업을 넘어 이제 저의 사명이 됐죠.”

하미둘 하산 씨가 인디애나 주 포트웨인시에서 로힝야족 난민들을 위해 통역 봉사를 하고 있다.
하미둘 하산 씨가 인디애나 주 포트웨인시에서 로힝야족 난민들을 위해 통역 봉사를 하고 있다.

하산 씨는 다른 건 없어도 누구보다 뛰어난 언어 습득 능력이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그 지역의 언어를 금방 익혔고, 미국에 와서도 2년 만에 영어를 통역할 수 있는 수준에 오르게 됐죠. 그리고 하산 씨는 영어 실력 덕분에 포트웨인시 로힝야 이민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됐습니다.

[녹취: 하미둘 하산] “이 지역에서 로힝야 어를 영어로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은 저 말고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유일한 로힝야 통역사인 거죠. 그렇다 보니까 사실 제 전화기는 밤에도 낮에도 쉴새 없이 울립니다. 사람들이 병원을 가거나 관공서를 찾을 때 통역을 돕는 것은 물론이고요. 상점에 물건을 사러 갈 때도 함께 가곤 합니다.”

하산 씨는 원래 가톨릭 자선 단체에서 통역일을 했었습니다. 로힝야 난민들이 인디애나주에 정착하는 걸 돕는 단체였죠. 하지만 보수를 좀 더 많이 주는 공장에서 일을 하기 위해 자선 단체를 그만뒀다고 합니다. 대신, 일하지 않는 시간엔 늘 사람들의 통역을 돕고 있다고 하네요.

[녹취: 하미둘 하산] “사람들이 저를 필요로 하거나 저의 도움이 필요할 때, 저는 이미 다른 사람을 돕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제가 이 지역 모든 사람의 통역을 다 도울 순 없거든요. 로힝야어 통역사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포트웨인시에는 현재 로힝야족 출신 난민이 약 150가정 있는데요. 하산 시는 포트웨인시에 최초로 정착한 로힝야 난민 가운데 한 명입니다. 하산 시는 미국에 정착한 후 다른 가족들도 다 미국으로 초청하고 싶었다는데요. 하지만 고향인 미얀마 라킨 주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됐고, 결국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녹취: 하미둘 하산] “미얀마 군인들이 한밤중에 저희 고향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형들과 형수님 등 가족들은 모두 자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죠. 당시 집에 계시지 않았던 저희 어머니는 목숨을 건졌는데요. 어머니 말씀이, 미얀마 군인들이 집을 불태우기 전에 밖에서 문을 잠가버렸다고 해요. 그래서 자고 있던 가족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결국 집과 함께 잿더미가 됐다는 겁니다.”

하산 씨는 지난 7월 그렇게 두 형을 잃었습니다. 마을을 도망친 어머니는 피난 길에 다리에 총을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방글라데시에 있는 로힝야 난민촌에 다다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난민촌에서 치료도 받았다고 하는데요. 지금은 세계 각지로 흩어진 가족들과 재회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현장음: 하산씨 로힝야어 통역]

[녹취: 하미둘 하산] “그들이 도망치려고 할 때 미얀마 군인들이 그들을 쐈습니다.”

다른 로힝야 난민을 위해 통역을 하고 있는 하산 씨. 이들의 이야기 역시 자신의 이야기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녹취: 하미둘 하산]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사선을 넘어, 가까스로 미국에 오게 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하루빨리 고향의 로힝야족들이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포트웨인시에 사는 미얀마 출신 난민은 모두 6천 명이 넘는데요. 미얀마가 수많은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나라이고 또 특정 민족에 대한 차별이나 박해가 있다 보니 서로 다른 민족적 배경을 가진 난민들이 미국에서 만나게 된다는 겁니다. 특히 로힝야족의 경우 언어도 다르지만 종교가 다른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게 일부 난민들의 지적인데요. 이런 미얀마 난민들의 특이한 상황은 미국 당국자들에게 매우 낯선 부분이자 다루기 힘든 부분일 수 있겠죠? 하지만 포트웨인시의 톰 헨리 시장은 미국에서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강조했습니다.

[녹취: 탐 헨리 시장] “우리 포트웨인시는 누구나 환영하는 도시라는 데 대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배척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그 어디서 온 난민이라도 따뜻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이들 난민이 궁극적으로 미국 국민이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고 있는데요. 장담하건대 민족간 서로 반목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포트웨인시는 아주 안전하고 평화로운 도시이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헨리 시장의 이런 약속은 하산 씨를 비롯해 모든 로힝야족 난민들이 바라는 바 인데요. 하산 씨는 미국에서 이루고자 하는 꿈도 개인적인 성취나 성공보다는 바로 로힝야 이민자들의 안녕이라고 했습니다.

[녹취: 하미둘 하산] “고향 미얀마에서는 서로 어떻게 지냈든, 이곳 미국에서는 서로 배척하지 않고 잘 지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 모두 다 난민으로 미국에 왔으니까요. 고향에서는 평화를 찾지 못했지만, 이곳 미국에서는 평화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미국에서 민족 간의 차별 없이 하나의 미얀마인 이민 사회를 이루는 것이 저의 꿈이자 희망입니다.”

네,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미얀마 로힝야족 출신 난민으로 미국에서 통역사로 활동하는 하미둘 하산 씨의 이야기와 함께했습니다.

‘나는 미국인입니다’는 오늘 이 시간을 끝으로 이제 프로그램을 마무리하게 됐습니다. 다양한 배경과 사연을 가진 난민들. 사선을 넘어 낯선 미국 땅에 와서 고생도 했지만, 나름대로 꿈과 희망을 일구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렸는데요. 미국 곳곳에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기적과 같은 난민들의 ‘아메리칸 드림’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저는 김현숙이었고요.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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