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블레인 하든 전 워싱턴포스트 기자] "노금석 대위 탈출기 통해 '김일성의 북한' 보여줄 것"

지난 1953년 9월 21일 소련제 미그15 전투기를 몰고 북한을 탈출해 한국 김포 비행장에 도착한 직후의 노금석 씨. (노금석 씨 제공 사진)

6.25전쟁 직후 미그 15 제트기를 몰고 북한을 탈출한 노금석 북한 공군 대위의 삶이 책으로 출간됐습니다. 탈북자 신동혁 씨를 주인공으로 한 ‘14호수용소 탈출’로 잘 알려진 블레인 하든 전 `워싱턴 포스트’ 신문 기자의 후속작이라 더욱 관심을 끌고 있는데요. 공산화에 환멸을 느낀 젊은 전투기 조종사와 당시 절대권력을 장악해 가던 김일성 주석의 만남과 이후 행적을 대비시키며, 북한의 원형이 만들어지던 시기와 과정을 집중 조명합니다. 저자인 하든 씨는 16일 ‘VOA’와의 인터뷰에서 김일성 주석을 북한의 시계를 멈추게 한 장본인으로 묘사하고, 60여 년 전 독재의 비극을 이미 감지한 21살 청년의 삶이 이후 얼마나 달라졌는지 강조했습니다. 또 신동혁 씨와의 작업 과정과 증언 오류로 인한 파장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습니다. 하든 씨를 백성원 기자가 인터뷰했습니다.

기자) 노금석 씨의 탈출기를 담은 새 책을 출간한 계기가 뭔가요?

하든) 노 씨가 먼저 제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켄 로라는 자신의 영어 이름을 소개한 뒤 한국 이름은 노금석이라고 했어요. 전 “미안하지만 당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죠. 그러자 노 씨가 자신이 1950년대에 잘 알려졌던 사람이라고 말해, 제가 알아보고 다시 전화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조사를 해 보니 그는 뛰어난 전투기 조종사였고, 1953년 북한을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어 노 씨에게 전화를 걸어 그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고 했고, 김일성의 등극과 미군의 북한 폭격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담고 싶다고 말하면서 집필이 시작된 겁니다.

기자) 노 씨와의 작업 과정은 순조로웠습니까?

하든) 그동안 수많은 탈북자들을 인터뷰했는데, 노 씨의 경우는 한결 수월했습니다. 훨씬 단순하고 명료했죠. 노 씨는 북한에서 교육을 잘 받은 기술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또 미국에서도 좋은 교육을 받고 평생을 항공학 기술자로 살았습니다. 서방의 교육과 과학적 기질을 둘 다 갖춰 질문에 직선적으로 답하더군요. 감출 게 없었고, 북한에서 학대 받지 않아 정신적 외상으로 고통 받은 적도 없습니다. 특히 그는 1953년 북한을 탈출해 김포공항에 도착한 뒤 6개월 동안 미 정보 당국으로부터 매일 5~6시간의 조사를 받았는데요. 마침 그 기록이 노 씨의 전화를 받기 바로 몇 달 전 기밀해제 문서로 분류됐습니다. 정말 우연이었죠. 그래서 그 문서와 대조해가며 노 씨를 인터뷰했고 50년이라는 세월의 안개를 뚫고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기자) 인터뷰와 집필 과정에서, 그의 잘 알려진 북한 탈출과 미국 정착 외에 새로 발견했거나 미처 예상치 못했던 측면이 있었나요?

블레인 하든 전 워싱턴포스트 동아시아 특파원이 16일 VOA와 인터뷰했다. 하든 전 특파원은 노금석 북한 공군 대위의 북한 탈출을 소재로 한 새 저서 집필 과정과 탈북자 신동혁 씨 증언 오류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하든) 매우 흥미로웠던 건 그가 북한을 탈출한 이유였습니다. 그는 북한 공군의 전투기 조종사였기 때문에 6.25전쟁 중 미군이북한을 폭격하는 걸 직접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 지역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으니까요. 북한의 누구라도 미국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기 쉬웠던 상황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당시 노 씨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의 성장 배경 때문이었죠. 그의 아버지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야구를 즐겼고, 아들에게 미국 관련 책을 건네주는 등 미국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노 씨는 그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 이미 아버지로부터 미국인들의 삶에 대한 설명과 미국에 가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전투기 조종사가 된 이유 역시 바로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종간을 붙잡고 북한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말이죠.

기자) 자유를 향한 티켓이었던 셈이군요. 새 책에서 묘사하고 강조하고 싶었던 내용은 무엇이었죠?

하든) 이미 16살 때 북한을 탈출하려고 마음 먹은 한 소년이 해군에 입대하고 공군에서 최연소 전투기 조종사가 되면서 천천히 그 방법을 찾아가는 극적인 과정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동시에 김일성이 권력을 장악해가는 상황도 함께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어떤 배경을 갖고 있는지, 6.25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스탈린, 마오쩌둥과 어떻게 협력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전쟁의 패배를 극복하고 독재자로 등극하는지 말입니다. 미국의 시각에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북한의 현재 모습은 바로 김일성이 1950년대에 만든 것이라는 사실 역시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지도자의 영향력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가 만으로 그를 판단한다면 김일성은 아마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도 주장할 수 있을 겁니다. 그가 사망한 뒤에도 북한은 전혀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는 그야말로 북한에서 시간이 멈춰지게 하는데 성공한 겁니다. 북한은 여전히 정치범 수용소가 존재하고, 정권에 대한 충성심에 따라 계층을 나누고, 군사비에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붇고, 주민들을 바깥 세계로부터 격리시키고, 여전히 김 씨 성을 가진 자가 통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기자) 60년 전 북한인들은 김일성을 각자 다른 시각에서 바라봤습니다. 노금석 씨는 당시 김일성에게서 무엇을 봤고 그 이미지가 이후 노 씨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하든) 노 씨는 1948년 고향인 함흥에서 김일성의 연설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그 곳 비료공장을 방문해 매우 힘찬 연설을 하죠. 16살이었던 노 씨는 김일성의 연설에 내재된 힘과 마법 같은 선동에 깊은 인상을 받지만, 동시에 그가 공산주의 독재를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때문에 그런 정부와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고 독재자 밑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바로 그 순간 북한을 탈출해야겠다고 처음 결심하게 되죠. 이 때부터 노 씨가 선택한 방법은 매우 창의적이었어요. 공산주의의 가장 열렬한 찬양자 행세를 한 겁니다. 김일성의 연설에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척 하면서 신뢰를 얻으려고 했고 결국 소련제 미그기 조종사가 되면서 그런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기자) 노금석 씨는 탈출 뒤 다른 탈북자들이 누리지 못했던 엄청난 유명세를 탔습니다. 시대적인 이유가 컸겠죠?

하든) 지정학상의 이유를 들고 싶습니다. 미국은 수 년 동안 소련제 전투기 미그기를 손에 넣고 싶어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었죠. 그래서 미그기를 미 공군기지로 몰고 오는 조종사에게 10만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공약은 1953년 6.25전쟁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그래서 노 씨가 미그기를 몰고 김포공항에 착륙했을 때 미국인들은 그가 상금을 원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오퍼레이션 물라 (moolah)’라는 작전명까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노 씨는 전쟁 중 주로 중국 기지에 주둔했기 때문에 그런 제안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 상금 때문에 노 씨의 탈출기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노 씨가 김포에 내린 1953년 9월21일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타임스’를 포함해 전세계 대부분의 유력 언론은 이 사건을 1면 톱기사로 다뤘습니다. 물론 러시아와 중국, 북한 언론을 제외하고 말이죠. 노 씨는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세계 언론이 가장 주목하는 인물이 된 겁니다. 그리고 그가 미 중앙정보국 (CIA)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와 대학에 입학할 때도 언론이 뒤를 따랐습니다. (한때 미국에서 가장 많은 판매 부수를 기록했던 주간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는 그의 미국 정착 과정을 장문의 연재기사로 보도했을 정도로 그는 유명 인사였습니다.

기자) 탈북자 신동혁 씨의 탈출기를 그린 ‘14호수용소 탈출’과 새 저서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주인공이 처했던 상황과 이후의 삶에 큰 차이가 있는 만큼, 이를 책에 담아내는 접근방식 또한 크게 달랐을 것 같습니다.

하든) 정말 낮과 밤의 차이라고 할 만합니다. 제가 신동혁 씨와 처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을 때 그는 정서적으로 매우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점은 지금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제수용소에서 자라면서 고문을 당했고 가족의 처형을 치켜봐야 했던 신 씨는 몹시 지쳐있었고, 또 숨고 싶어했습니다. 이런 성향은 극복하기 매우 힘들고, 그는 주위 사람을 신뢰하는 데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그의 진술의 일부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진실이라고 믿는 이야기는 다른 경험을 가진 이들의 (진실에 대한) 개념과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신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위장막으로 삼아 그 뒤에 숨고자 했죠. 반면 노금석 씨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북한에서 대학까지 진학했고 미그기 조종사가 됐습니다. 북한 정권을 증오했지만, 당국에 의해 육체적인 고통을 당한 건 아니었습니다. 21살에 미국 공군기지에 도착한 뒤에도 좋은 대접을 받았고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미국 생활에 완전히 동화했습니다. 영어를 배웠고 한국 음식을 고집하지도 않았고 항공학 기술자로 살면서 미국 내 한인사회와의 교류도 없었습니다.

기자) 일부 탈북자의 증언에 오류가 있더라도 그들의 목소리와 상상하기 힘든 고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든) 수많은 탈북자가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겪고 있습니다. 신동혁 씨는 그 중에서도 심한 편입니다. 이런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은 직선적이고 확실한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는 게 심리학자들의 진단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세부 내용과 장소, 시기 등이 난해하게 얽혀 있습니다. 바로 신동혁 씨의 경우죠. 하지만 탈북자들은 그들이 인간으로서 겪은 경험을 말하는 것이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강제수용소의 실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북한 당국이 부인하는 현지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신동혁 씨의 몸에 난 흉터를 보면 그가 고문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낸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신 씨의 어머니와 형이 공개처형 됐고, 그가 이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는 매우 확고한 증거가 있습니다. 저는 그 공개처형 현장에 있었던 수용소 생존자와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신 씨가 14호 수용소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그가 예닐곱 살 때 수용소의 경계가 옮겨졌다는 확고한 증거 역시 있습니다.

기자) 신동혁 씨는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하든)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신 씨는 북한의 강제수용소 폐쇄를 위한 증인이 됐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증언의 일부가 거짓으로 밝혀지면서 북한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조를 다소 약화시켰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에 가슴 아파합니다. 하지만 그는 수용소 생활을 실제 경험했고, 여전히 존재하는 이런 시설에서 인권 유린이 자행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기자) 신동혁 씨 관련 파장을 보면서 또 다른 탈북자를 주인공으로 한 책을 출간하는데 부담은 없었습니까?

하든)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동혁 씨 관련 소식이 알려졌을 때 이미 새 책 집필을 마친 상태였으니까요. 흥미로운 건 신 씨가 지난 10년 동안 같은 내용만을 일관적으로 말해 왔다는 겁니다. 지난해 말 북한이 영상을 통해 신 씨 아버지와의 인터뷰를 공개하기 전까지 말이죠. 그 시점부터 신 씨가 서울의 몇몇 지인들에게 진실을 말하기 시작했어요. 당시만해도 제게는 얘기하지 않았던 내용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가 18호 수용소 출신이라는 걸 지난 1월에야 알았습니다. 이에 비해 노금석 씨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종류입니다. 노 씨는 전투기 조종사로서 모든 비행 기록과 공훈 메달 등 확실한 증거를 갖고 망명했죠. 노 씨는 아마 탈북자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출신 배경과 행적 등에 대해 엄격한 조사를 거쳤을 겁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그의 어머니가 수많은 사진을 들고 미국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엔 일제 치하 북한 지역에 살던 노 씨의 가족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따라서 노 씨의 경우는 그의 기억 뿐아니라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충분한 물증들이 있었습니다.

기자) 하지만 앞으로 탈북자에 관한 책을 집필한다면, 신동혁 씨 때와는 접근방식이 다소 달라지지 않을까요?

하든) 그럴 겁니다. 정신적 외상이 탈북자들의 기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지금은 더 잘 이해하게 됐으니까요. 또 한 가지는 제가 신동혁 씨와 처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2008년만 해도 서울에서 신 씨의 증언을 반박할 18호 수용소 출신 탈북자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영상 속 신 씨 아버지를 알아본 탈북자 두 세 명은 제가 책을 쓸 당시 중국을 통해 한국으로 이동하는 탈북 과정에 있었습니다. 그 때 만났던 신 씨는 14호 수용소 사정을 잘 알았고 몸에 난 흉터와 정신적 외상이 누구보다도 심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전문가들도 모두 신 씨의 이야기를 믿고 있는 상황에서, 제가 관련 사실을 보도하며 또 다른 어떤 증거를 찾을 수 있었을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기자) 최근 들어 북한과 탈북자들의 체험을 담은 서적들이 큰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일반 대중과 언론이 여기에 주목하는 이유가 뭐라고 보시는지요?

하든) 15년 전만 해도 탈북자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중국으로 넘어가 한국으로 탈출하는 경로를 찾기 어려웠죠. 하지만 이제 한국에만도 2만8천 명의 탈북자가 사는 것으로 압니다. 그들은 북한에서의 삶에 대해 놀랄 만큼 구체적인 그림을 보여주죠. 뿐만 아니라 인공위성 사진을 통해 북한의 강제수용소 등 이들의 증언을 확인할 수 있게 됐습니다. 거의 사회과학의 주제가 될 수 있을 만한 수준입니다. 이렇게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이 가능한 북한의 인권 유린은 정말 엄청난 수준입니다.

기자) 혹시 다음 저서에도 북한이나 탈북자에 관한 내용을 담으실 계획인지요?

하든) 아직 대답하기 이릅니다. 여전히 구상 중입니다.

블레인 하든 전 워싱턴 포스트 기자로부터 노금석 씨 망명을 소재로 한 새 저서, 그리고 신동혁 씨 관련 파장에 대한 입장을 들어봤습니다. 인터뷰에 백성원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