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미국 뉴스의 배경과 관련 용어를 설명해드리는 미국 뉴스 따라잡기 시간입니다. 오늘은 김정우 기자 함께 합니다.
진행자) 오늘은 어떤 주제를 알아볼까요?
기자) 네. 수요일 (16일) 저녁에 미국 공화당 대선 경선 후보들이 참여한 2차 토론회가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기념도서관에서 열렸습니다. 토론회에 나온 후보들은 토론회 장소를 생각해서인지 자신이 레이건 대통령을 계승하는 유일한 후보라고 목소리를 높였는데요. 오늘 알아볼 주제는 미국의 40대 대통령을 지낸 ‘로널드 레이건’입니다.
진행자)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아주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죠?
기자) 그렇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미국 영화계를 뜻하는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활동했습니다. 그럼 레이건 대통령의 이력을 잠깐 정리해볼까요? 레이건은 1911년 일리노이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라디오에서 운동경기를 중계하는 아나운서를 했는데요. 그러다가 레이건은 1937년 영화배우로 변신하는데, 그 후 20년 동안 영화 53편에 출연했습니다.
진행자) 배우로 활동하던 레이건이 어떻게 정치인이 됐는지 궁금하네요?
기자) 네. 레이건은 할리우드에 있을 때 배우조합 회장으로 있으면서 영화산업 안에 있는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작업에 협력했습니다. 그 뒤에 텔레비전 방송 진행자로 활동했는데요.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계기는 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 배리 골드워터 공화당 후보를 위해 일하면서였습니다. 당시 레이건은 뛰어난 연설 실력으로 강한 인상을 남겠고요. 이를 바탕으로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나서서 현직 민주당 주지사를 누르고 당선됐습니다.
진행자) 그러니까 배우였던 레이건이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서 대통령이 된 거네요?
기자) 그렇습니다. 레이건은 1968년과 1976년에 공화당 대선 경선에 나왔는데요. 후보 지명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지명돼 당시 현직에 있던 카터 대통령을 누르고 미국의 40대 대통령이 돼서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재임합니다.
진행자) 자, 그럼 이제 레이건이 대통령직에 있던 시기를 살펴볼까요?
기자) 네. 가장 먼저 경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요. 레이건이 백악관에 들어갈 때 미국 경제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미국 경제는 엄청나게 늘어난 재정적자에 경기가 침체해 있었고요. 물가가 크게 오르면서 실업률도 높았는데, 이런 상황을 해결하려고 레이건은 특별한 조처를 도입합니다.
진행자) 특별한 조처란 게 이른바 ‘레이거노믹스’라는 것 아닙니까?
기자) 맞습니다. ‘레이건’과 경제학를 말하는 영어 ‘이코노믹스’를 합쳐서 레이건 대통령이 추진한 경제정책을 ‘레이거노믹스’라고 하죠? 이 ‘레이거노믹스’는 크게 네 가지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중앙정부가 쓰는 돈을 대폭 줄이는 정책입니다. 다음 경기를 살리기 위해서 세금을 줄였는데, 특히 소득세를 대폭 줄였습니다. 세 번째로는 기업 활동을 활성화하려고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이 있고요. 마지막으로 금리를 올려서 물가가 오르는 것을 막는 조처가 들어갔습니다. 이런 조처들은 물론 부작용이 있었는데요. 하지만 물가가 안정되는 등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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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자) 네. ‘생방송 여기는 워싱턴입니다 -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40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로널드 레이건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습니다. 김정우 기자, 레이건 대통령 하면 또 대외정책을 빼놓을 수 없지 않습니까?
기자) 그렇습니다. 냉전이 끝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 가운데 1명이 바로 이 레이건 대통령입니다. 레이건은 취임 초기부터 소련을 대표하는 공산주의 진영에 강력하게 맞서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레이건 행정부는 군사력을 대폭 증강하는 등 공산주의 진영을 옥죄는 정책들을 밀고 나갔는데요. 당시에 이미 여러 부분에서 어려움에 부닥쳐 있던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여기에 말려들면서 결국 개혁, 개방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개혁, 개방 정책이 나중에 소련이 무너지는 데 결정적인 원인이 됐는데요. 그래서 레이건 대통령의 강경한 대외정책이 나중에 냉전이 끝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러니까 미국 사람들이 레이건 대통령에 대해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 경제와 대외정책에서 거둔 업적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기자) 그렇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어려움에 빠져 있던 경제를 살려서 1990년대에 이어지는 경제호황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가 있고요. 또 많은 미국인이 레이건 대통령이 강력한 국방력을 바탕으로 소련을 굴복시켜 미국을 다시 초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밖에도 농담을 잘하고 인간적이었던 레이건 대통령의 모습을 좋아하는 미국인들이 많습니다.
진행자) 하지만 모든 것에는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인데요. 이렇게 존경받는 레이건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없을 수는 없겠죠?
기자) 물론입니다. 레이건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말은 주로 진보진영에서 나오는데요. 레이건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레이건 정부가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폈고, 그 결과 빈부 격차가 심해졌다고 지적합니다. 또 레이건 행정부가 작은 정부를 강조하면서 등장했지만, 오히려 재임 기간에 재정적자가 늘었다고 비판하는데요. 실제로 레이건 정부가 소련과 군비 경쟁을 벌인 탓에 미국의 재정적자는 1980년과 1986년 사이에 약 2배 이상 늘었습니다.
진행자) 대외정책에서도 부정적인 평가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기자) 그렇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을 비판할 때 꼭 나오는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이란-콘트라 사건’이죠? 이 사건은 이란에 몰래 무기를 팔고 받은 돈으로 니카라과 우익 반군을 지원한 사건입니다. 물론 레이건 대통령이 이 일에 얼마나 연관돼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이 사건으로 레이건 정권의 도덕성에 상당히 흠이 간 게 사실입니다. 그밖에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한국이나 중남미 등에서 독재정권을 두둔했다는 비난도 있습니다.
진행자) 이런 몇몇 부정적인 평가가 있어도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 안에서 많은 사람이 추앙하지 않습니까?
기자) 맞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여론조사를 해보면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 가운데 1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특히 공화당은 레이건 대통령을 보수주의자들의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죠. 만년에 노인성 치매에 시달리던 레이건 대통령은 지난 2004년에 세상을 떠났는데요. 퇴임하고 살아있을 때 이미 그의 이름을 딴 군함과 도서관, 공항이 생길 정도로 레이건은 미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대통령입니다.
진행자) 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지금까지 ‘미국 뉴스 따라잡기’ 김정우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