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추락한 동료 조종사를 구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던 토머스 허드너 씨의 이야기가 최근 출간되면서 인종과 배경을 초월한 두 미군 병사의 전우애가 다시 조명 받고 있습니다. 미 해군 조종사로 참전했던 허드너 씨는 당시 부서진 기체에 갇혀있던 전우를 탈출시키기 위해 적진에서 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실패했는데요. 올해 91살인 허드너 씨는 지난주 ‘VOA’와의 인터뷰에서 미 해군 최초의 흑인 조종사 제시 브라운 소위와의 우정과 그의 마지막 모습을 회고했습니다. 백성원 기자가 인터뷰했습니다.
기자) 6.25전쟁이 발발한 지 3개월 만에 참전 명령을 받은 것으로 압니다. 알지도 못하는 이국 땅으로 향할 때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허드너 씨) 참전하고 싶었습니다. 언제나 전투를 할 준비가 돼 있었으니까요. 물론 1950년 6.25전쟁에서 싸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지중해에 주둔해 있던 어느 일요일 오후 북한 군의 침략 소식을 듣고, (한반도로) 가고 싶었습니다.
기자) 그리고 그 해 겨울 장진호 전투에 투입되셨습니다. 엄청나게 치열했던 싸움이었죠?
허드너 씨) 출격할 때마다 적과 맞닥뜨릴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매우 치열한 싸움이 될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죠. 우린 우수한 항공기를 갖추고 있었고 어떤 전투에서도 싸울 수 있도록 좋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첫 날부터 적진에 투입됐지만, 우린 싸울 준비가 돼 있었습니다.
기자) 동료 조종사인 제시 브라운 소위가 몰던 항공기가 추락하던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회고해 주시겠습니까?
허드너 씨)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적 항공기의 사정거리 안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 언제든 피격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모든 아군 항공기가 공격을 받았는데 지상으로부터의 공격이 더 거셌습니다. 그러던 중 브라운 소위가 몰던 항공기에서 하얀 가솔린 연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추진력을 잃기 시작하더군요. 지상은 완전히 산악지대였고 눈으로 덮여있어 지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언덕과 계곡만 이어져 있어 제시가 과연 착륙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앞쪽으로 제시의 추락 지점이 보였습니다.
기자) 그리고 동료를 구하기 위해 그대로 항공기를 비상착륙시키셨죠? 적군의 총에 맞을 수도 있고, 항공기가 폭발할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는데요.
허드너 씨)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살아있다는 걸 알았고, 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어떤 위험도 감수하려고 했습니다. 무선으로 구조를 요청했고 구조 헬기가 30분 후에 도착한다는 응답을 받았지만, 제시의 항공기에선 계속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항공기에 갇혀 움직이지 못한 채 불 속에서 생명이 꺼져가는 것보다 더 끔찍한 상황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시는 제 친구였습니다. 목숨을 걸고라도 그를 탈출시키고 싶었습니다.
기자) 적진 한 가운데서 불가능에 가까운 구조작업을 벌이신 걸로 압니다.
허드너 씨) 구조 헬기가 30분 만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함께 배를 타고 전장까지 이동했던 해병대원이 헬기 안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추락 항공기에 끼어있는 제시를 즉시 알아봤습니다. 저는 헬기 조종사에게 도끼와 소화전을 부탁했지만 눈 덮인 산속에서 동료를 구출시키려는 작업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눈이 쌓여있는데다 도무지 평지에 발을 디딜 수 없어 제시를 끄집어 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기자) 브라운 소위와 나눴던 마지막 대화를 기억하십니까?
허드너 씨) 아내에게 얼마나 사랑하는지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제시는 아내를 정말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시를 기체에서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헬기 조종사가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암흑 속에선 헬기를 조종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는 더욱 걱정했습니다.
기자) 동료를 남겨두고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어 참담하셨겠습니다.
허드너 씨) 아, 정말 끔찍한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제시에게 그를 기체에서 빼낼 수 있을만한 장비를 가지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완전한 거짓말이 될 줄은 누구도 확실히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시는 별 말이 없었습니다. 혹한의 날씨 속에서 그가 얼마나 추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추락한 뒤에도 그는 계속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린 살아있는 친구를 남기고 떠난 겁니다. 제시는 이후 오래 버티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인종차별이 심했던 당시 인종과 출신 배경이 너무나 달랐던 두 분이 우정을 나누게 된 상황을 설명해 주시죠.
허드너 씨) 우리는 같은 비행중대 소속으로 거의 함께 비행했습니다. 제시는 정말 친절했고 똑똑했죠. 우리는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우정을 쌓았습니다.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기자) 브라운 소위에게 다시 돌아오겠다고 한 마지막 말을 평생 짊어지고 사셨나 봅니다.
허드너 씨) 그러나 그 곳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제시의 유해라도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에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자) 그러나 결국 동료와의 약속을 지키셨지요. 2013년 브라운 소위의 유해를 찾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시지 않았습니까?
허드너 씨) 상상도 못했던 일이 현실이 된 겁니다. 북한을 방문해 어서 그 추락 지점으로 올라가 제시의 유해를 그 비행기에서 꺼내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기자) 방북 당시 북한 측 반응은 어땠나요?
허드너 씨) 놀라울 정도로 좋았습니다. 인민군 고위 당국자 3 명과 5 차례 정도 면담했는데, 우리에게 매우 친절했고 적개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북한이나 한국 모두 매우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두 나라가 서로 전쟁을 벌인 건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방북 당시 북한 측 인사들과의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 좋아졌지만 그들은 우리를 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언제 어디서든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고요. 당시 장마 기간과 겹쳐 제시 유해를 찾기 위해 현장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북한 측은 발굴 장비를 제공할 순 없지만 인력은 얼마든지 지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자) 귀국 직후 존 케리 국무장관에게 유해 발굴 작업을 위해 북한과 대화를 재개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신 걸로 아는데요. 국무부로부터 답장을 받으셨는지요?
허드너 씨) 받지 못했습니다. 국무부로부터 어떤 연락도 없었습니다. 미국 정부로부터 (유해 발굴 논의를 위해) 북한 측과의 접촉점을 마련할 수 있는 비공식 서한이라도 받지 못한 것은 무척 아쉽습니다. 미국이나 북한 당국 모두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접촉할 준비가 안 돼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6.25 전쟁에 미 해군 조종사로 참전했던 토머스 허드너 예비역 대령으로부터 전쟁의 비극과 전장에 두고 온 전우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들어봤습니다. 대담에 백성원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