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 (자료사진)

주요 미국 뉴스의 배경과 관련 용어를 설명해드리는 미국 뉴스 따라잡기 시간입니다. 박영서 기자 나와 있습니다.

진행자) 오늘 미국뉴스 따라잡기 시간에는 어떤 주제에 대해 알아볼까요?

기자) 네, 지난 8월이었죠.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참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쾌유를 빌었는데요. 암이 다 완치됐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일요일인 6일, 출석 중인 교회에서 암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직접 발표했는데요. 이 소식에 많은 미국민들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있습니다. 네, 미국 뉴스 따라잡기 오늘 이 시간에는 미국의 제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진행자)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죠?

기자) 1924년 10월 1일 생이니까 올해 91살입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미국 남부 조지아 주에서 땅콩 농장을 운영하는 제임스와 베시 카터 부부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요. 카터 전 대통령도 정계에 진출하기 전에 고향에서 땅콩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기 때문에 땅콩 농부라는 별명이 따라다녔습니다.

진행자) 그럼 카터 전 대통령의 전공이 농업이나 경영 쪽이었나요?

기자) 아닙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조지아 주 공과대학을 다니다가 메릴랜드 주에 있는 미 해군사관학교를 들어갔는데요. 해사 성적표 같은 자료를 보면 아주 두각을 나타내는 생도는 아니었고요. 해사 졸업 후에는 해군 장교로 복무하다 1953년, 29살에 대위로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갔습니다.

진행자) 정계에는 언제 입문했습니까?

기자) 네, 1962년, 38살 때 처음 조지아 주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했는데요. 이 첫 도전에서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부정 선거였던 게 드러나 당선됐고요. 4년 상원 임기를 마치고는 1966년에 조지아 주지사 선거에 도전하는데요. 여기서도 낙선합니다. 하지만 카터 전 대통령은 다시 4년 뒤인 1970년 주지사 선거에 도전해 당선돼 4년간 조지아 주를 이끌었습니다.

진행자) 처음 워싱턴 중앙무대에 진출했을 때는 조지아 주에서 온 시골뜨기라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도 좀 있었다고요.

기자) 네, 1976년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자, 처음엔 시덥지 않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민주당 경선 후보들로 나선 다른 정치인들에 비해 지명도도 거의 없었고, 유권자들의 마음을 잡아 끌만한 어떤 강렬한 매력도 없어 처음에는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진행자) 당시 공화당 후보로는 누가 나섰죠?

기자) 네, 제럴드 포드 당시 대통령이었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어떻게 현역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될 수 있었던 걸까요?

기자) 카터 전 대통령이 내건 첫번 째 공약이 정직과 도덕이었습니다. 정직과 도덕이라는 이런 다소 무겁고 관념적인 정책이 먹힐 수 있었던 건 당시 시대적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진행자) 1970년대 미국의 정계가 사실 상당히 어수선할 때였죠.

기자) 맞습니다.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나고, 그 뒤를 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이어받아 이끌고 있었죠. 워터게이트 사건은 전에 미국뉴스 따라잡기 이 시간에도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요. 미국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안긴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국민들 사이에는 도덕성에 대한 어떤 위기 의식 같은 게 있었고요. 이 때 마침 카터 전 대통령이 도덕주의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고 나온 겁니다.

진행자) 그러데 막상 재임 중 인기가 별로 없었던 대통령으로 평가되지 않았습니까?

기자) 맞습니다. 당시 미국 경제가 좋지 않은데 도덕 교과서에 나올만한 이야기를 계속 하니 국민은 물론, 같은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로부터도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습니다. 도덕적인 이야기가 말이야 맞는 말인데 별로 듣고 싶지는 않은, 그런 심리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요. 지지율이 항상 낮았습니다. 역대 재임 중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을 꼽으면 카터 대통령 이름이 거의 빠지지 않습니다.

진행자)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도 카터 대통령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데 한 몫 하지 않았습니까?

기자) 네, 카터 대통령 임기 말기인 1980년에 이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있던 50여명의 미국인들이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했죠. 미국은 이란 정부를 달래도 보고 위협도 해보지만 말을 듣지 않자 결국은 인질들을 구출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단행하는데요. 하지만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이 과정에서 8명이 목숨을 잃습니다. 결국 이 사건의 여파로 카터 전 대통령은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패하고 말고요. 미국 역사상 연임에 실패한 몇 안 되는 대통령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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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자) 생방송! 여기는 워싱턴입니다. 미국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미국의 제 39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 대해 알아보고 있습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재임 중보다 퇴임 후에 인기가 더 많은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는데요. 퇴임 후에는 곧바로 고향 조지아 주로 돌아갔습니까?

기자) 네, 카터 전대통령이 퇴임했을 때가 57살이었습니다. 정치인으로서 한참 더 왕성하게 활동할 수도 있는 나이였는데요. 하지만 워싱턴을 떠나 고향으로 간 카터 전 대통령은 건축 현장에서 망치를 들고 못을 박고 있는 그런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다시 나타났습니다.

진행자) 저도 카터 전 대통령이 청바지를 입고 사다리에 올라서서 망치질을 하고 있는 사진을 처음 봤을 때의 그 신선한 충격이 지금도 생생한데요. 사랑의 집짓기 운동(Habitat for Humanity) 말씀 하시는 거죠?

기자) 맞습니다. 그리고 카터 전 대통령 특유의 큰 이를 드러내놓고 활짝 웃는 모습도 빼놓을 수는 없죠. 사랑의 집짓기 운동은 열악한 조건의 주거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비영리 국제기구인데요. 카터 전대통령은 퇴임 후 이 사랑의 집짓기 운동에 참여해 세계 각국을 돌며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직접 집도 지어주고 또 아주 적극적으로 단체의 활동도 홍보했습니다. 이 사랑의 집짓기 운동은 카터 전 대통령이 설립한 단체가 아닌데요. 이제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의 대명사처럼 돼 있습니다. 또 1982년에는 직접 카터 재단을 설립해 제 3세계 빈곤층 지원과 인권운동 등에도 앞장서왔습니다.

진행자) 카터 대통령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요.

기자) 네, 카터 대통령은 고령에다, 암이 발병된 걸 알고 난 후에도 교회에 계속 출석하면서 일요 성경공부를 이끌 만큼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유명합니다.

진행자)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또 한국과도 특별히 인연이 깊은 대통령 아닙니까?

기자) 네, 임기 중에는 한국의 인권 상황을 비판하고,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말하면서 한국과의 관계가 크게 불편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1979년 6월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다소 풀어졌습니다. 참고로 카터 전 대통령이 재임한 1977년에서 1981년은 한국은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를 지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진행자) 퇴임한 후에는 북한도 방문하지 않았습니까?

기자) 네, 1993년에 1차 북핵위기사태가 벌어지자 이듬 해 미국의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었죠. 이때 김일성 북한 주석과 면담을 갖고 중재자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갔던 한반도 위기 사태 해결에 크게 기여했고요. 이후에도 북한에 억류돼 있던 미국인 인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는 등 몇 차례 더 북한을 찾았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인도적 활동과 국제평화에 힘쓴 공로로 지난 2002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진행자) 카터 전 대통령의 암 완치 소식에 많은 미국인들이 함께 기뻐하고 있는데요. 카터 전 대통령, 미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참 지도자로 한동안 더 미국인들의 곁에 남아있기를 기대해보고요. 네 미국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박영서 기자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