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소개해드리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소아마비를 극복하고 로마올림픽 육상 3관왕이 된 윌마 루돌프를 만나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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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적으로 가정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어려운 조건이란 조건은 다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미국 최초의 올림픽 여자 육상 3관왕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윌마 루돌프.
윌마 루돌프는 1940년 6월 23일, 미국 남부 테네시주 세인트 베들레헴이란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자녀가 22명이나 되는 무척 가난한 흑인 가정의 20번째 아이였습니다. 태어날 당시 몸무게는 고작 2kg. 이후 4살 때는 양쪽 폐에 모두 폐렴이 걸렸습니다. 또 성홍열을 앓으며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또 왼쪽 다리가 한쪽으로 휘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는 소아마비 선고를 내렸고 그녀가 다시는 걷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게 점원 또는 도로공사 노동자 등을 전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정부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흑인 가정이 그랬지만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굴레를 안고 살았습니다. 윌마는 반드시 걷고 집안에서 최초로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 되겠다는 강력한 열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큰 기적을 일으키는지가 여기서 나타납니다. 윌마는 보조기구를 착용해야 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매주 토요일마다 80km나 떨어진 내슈빌에 있는 대학병원에 버스를 타기도 하고 업고 가기도 해서 물리치료와 마사지를 받도록 했습니다.
매일 병원에 들를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한 의사는 집에서도 할 수 있는 물리치료법을 어머니에게 가르쳐 줍니다. 어머니는 집에 와서 매일 그대로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자녀들에게도 그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어머니, 언니, 오빠가 모두 동원이 돼서 하루에 적어도 네 번 윌마의 다리를 마사지했습니다. 어떤 때는 밤새 발을 주물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몇cm라도 앞으로 걸으면 윌마를 칭찬하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윌마는 다리에 많은 통증이 왔지만, 남들처럼 다시 걷기 원하는 소원을 가지고 재활치료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온 가족이 끊임없이 그녀를 보살핀 덕분에 윌마는 조금씩 나아졌고 그렇게 4년이 지난 8살 때 윌마는 보조기구를 통해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아홉 살이 되던 해 드디어 교정기를 떼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절뚝거렸지만 걸어서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오빠들은 윌마가 11살 때 집에 농구대를 설치하고 윌마와 함께 농구를 했습니다. 윌마는 농구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 여자농구팀에 들어갑니다. 그때 코치는 윌마가 농구를 잘하는 것을 발견하고, 사격 선수라는 의미로 'Skeeter'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어느 때는 한 게임에서 무려 혼자 49점을 냈는데, 테네시 주의 신기록이었습니다. 그녀의 농구를 본 사람들은 윌마가 매우 잘 달린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때 고등학교에 육상팀이 만들어져 윌마는 육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윌마는 쉬지 않고 달리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 결과 16살, 아직도 고등학교 재학 중에 호주 멜버른 올림픽 대회에 미국 여자 육상 대표로 선발됐습니다. 미국 선수단 중 가장 나이 어린 선수였습니다. 윌마는 400m 계주에 출전해 동메달을 땄습니다.
올림픽 후 윌마는 테네시 주립 대학으로 진학을 했습니다. 대학에서도 육상을 계속했습니다. 대학 육상팀 코치 에드 템플은 혹독하게 선수들을 훈련시키는 걸로 유명했습니다. 달리기에 모든 정열을 쏟은 윌마는 1960년 여자 2천m 달리기에서 세계 신기록이라는 놀라운 실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다가 1960년 로마 올림픽에도 출전을 하게 됩니다. 윌마는 여자 100m 달리기에 출전했습니다. 강력한 경쟁자는 그때까지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고 강력한 우승 후보자로 지목되던 영국의 주타 하이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윌마는 여유 있게 1위를 차지했습니다. 윌마는 200m, 400m 계주에 연이어 출전해 1위로 골인합니다. 모두 세계 신기록이었습니다. 400m 계주 미국 선수들이 모두 테네시 주립대학 육상팀이었습니다.
윌마의 기적 같은 3관왕 달성 이야기는 로마 올림픽의 큰 화제거리였습니다.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 한국에서까지 윌마 루돌프의 이야기가 퍼져 나갔습니다. 에이피 통신은 윌마 루돌프를 그 해의 여성 체육인으로 선정했습니다.
그 다음 해인 1961년 독일에서 벌어진 육상대회 100m에서도 윌마는 11초 2분으로 자신의 기록을 또 다시 갱신하는 세계 신기록을 수립합니다. 이어 미국과 소련의 육상대회를 끝으로 윌마는 은퇴를 선언합니다. 22세 때였습니다.
윌마에게는 여러 가지 상이 수여됐습니다. 가장 뛰어난 아마추어 선수에게 수여하는 설리반상, ‘국제 여자 스포츠 명예의 전당’, ‘미국 육상경기 명예의 전당’, ‘올림픽 명예의 전당’, ‘흑인선수 명예의 전당’ 등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1986년에는 영예로운 미국 스포츠 아카데미상도 받았습니다. NBC 텔레비전은 윌마의 영화도 만들었고 미국 정부는 윌마 루돌프 기념 우표까지 만들었습니다.
그 같은 영웅 대접을 받았는데도 윌마는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실제로 돈을 벌기 위한 경기도 하지 않았고, 아마추어로만 활약했습니다. 은퇴 후에는 학교의 교사로, 대학 육상팀 코치 등으로 활동했습니다. 특히 ‘윌마 루돌프 재단’을 설립해 가난한 아이들을 돕고, 청소년 육상경기대회를 지원했습니다.
윌마는 육상 선수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민권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자신이 흑인여성으로서 많은 차별 들을 경험했기에, 인권운동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올림픽에서 돌아온 다음 있었던 환영식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윌마의 고향인 테네시주에서는 여러 가지 환영행사가 있었는데, 윌마는 주 지사에게 흑인 백인이 따로 앉는 환영식이라면 나가지 않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고향인 클락스빌에서 벌어진 시가행진과 만찬 등의 행사는 흑백 분리가 없이 치러졌습니다. 그것은 클락스빌이라는 도시가 생긴 이래 흑백 인종이 함께 섞여서 행사를 한 최초의 기록이기도 했습니다.
한창 후진 양성과 인종 평등을 위해 일을 하던 윌마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뇌종양을 갖고 있던 윌마는 1994년, 54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습니다. 윌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고향 마을에 있는 79번 국도를 ‘윌마 루돌프 가로수길’이라는 이름으로 정하고 언제까지나 그를 추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