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20세기 최고 콘트랄토' 메리언 앤더슨

메리언 앤더슨(오른쪽)이 지난 1939년 4월 9일 부활절을 맞아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 앞에서 콘서트를 열기 직전 해롤드 익스 내무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소개해드리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석탄장수의 딸로 태어나 세계적인 콘트랄토가 된 메리언 앤더슨을 소개해드립니다.

미국의 성악가로 20세기 최고의 여성 알토로 꼽히는 메리언 앤더슨. 메리언 앤더슨은 역사상 최고 콘트랄토(contralto), 즉 여성 최저음 영역의 가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메리언 앤더슨은 1897년 펜실바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무척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메리언은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 불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처음 노래를 한 것이 5살 때 교회에서였는데, 독특한 목소리와 뛰어난 노래 솜씨로 큰 화제가 됐습니다. 기독교 신앙심이 깊어서 교회의 노래 봉사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녀는 가난 때문에, 그리고 인종차별 때문에 평생 단 한 번도 정규 음악학교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속 상하는 경험도 참 많이 했습니다. 다행히 메리언은 교회 사람들의 도움으로 필라델피아에서 아주 유명한 성악 교사 주세페 보게티 를 찾아가게 됐습니다. 보게티는 노래를 들어보고 결정하자고 했습니다. 몹시 긴장했던 메리언이 이때 부른 노래는 성가인 "Deep River"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용히 노래를 듣던 보게티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별로 신통치 않게 생각했던 보게티는 메리언의 노래에 감동을 받은 겁니다. 그리고는 당장 내일부터 레슨을 시작하자고 말합니다. 보게티는 나하고는 2년만 공부하자, 그 다음부터는 어디에, 어떤 사람한테 가도 레슨을 받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메리언은 여기서 발성, 호흡 등 기본적인 것들을 배우고, 주로 유명한 유럽 작곡가들의 클래식을 배웠습니다.

메리언은 20대 때, 두 차례 큰 무대에 서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1924년에 메리언은 처음으로 당시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콘서트홀인 타운홀에 설 기회가 있었습니다. 뉴욕 타운홀에 선다는 것은 음악인들에게는 대단한 영광이었습니다. 메리언은 흑인 영가와 클래식을 노래했습니다. 메리언의 목소리는 폭이 굉장히 넓어 낮은 소리에서 높은 소리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음악회는 실패였습니다. 흑인이라는 것을 알고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신문들은 그녀가 소프라노도, 알토도, 베이스도 아니라고 혹평했고, 유럽 음악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감정 전달도 안 된다고 난타했습니다. 충격을 받은 메리언은 다시는 노래를 하지 않겠다며 필라델피아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메리언은 좌절하지 않고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또 노래를 했습니다. 이 음악회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메리언은 미국 여러 도시에서 노래를 부르는 계약에 서명합니다. 메리언은 주로 미국 남부 흑인들이 모이는 공연장에만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리언은 백인들이 투숙하는 호텔에서는 방을 얻을 수도, 식당에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1930년대, 메리언 앤더슨은 영국 런던에서 음악 공부를 할 수 있는 장학금을 구하게 됩니다. 당시 흑인 예술가들이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유럽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메리언도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메리언은 나중에 한 인터뷰에서 "유럽에서는 환영을 받았다, 호텔에서도 받아주었다, 유럽인들은 나를 피부색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로 판단을 해주었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메리언은 영국 런던과 독일 베를린 등지에서 공부도 하고 공연도 했습니다. 스웨덴 공연에서는 코스티 베하넨이 피아노 반주를 했습니다. 베하넨은 메리언의 목소리가 땅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처럼 강렬하고 구슬프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스웨덴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메리언의 흑인 영가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메리언은 이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순회 공연해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습니다. 핀란드 헬싱키에서는 유명한 핀란드 작곡가 진 시벨리우스의 곡을 노래했습니다. 시벨리우스는 메리언에게 당신의 목소리에는 우리 집 지붕이 너무 낮다고 말했습니다. 메리언은 핀란드 민요도 불렀습니다. 1930년대 전반 메리언은 유럽 각국에서 무려116회에 달하는 순회 공연을 가졌습니다. 덴마크와 스웨덴에서는 왕 앞에서도 공연을 했습니다.

메리언은 이렇게 유럽에서 성공하자 모국인 미국에서 시험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습니다. 미국의 콘서트홀 소유주들은 메리언의 성공 소식에도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흑인 가수들은 청중을 끌어모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업이 안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메리언은 또 옛날처럼 조그마한 흑인 교회들을 돌며 노래를 부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으로 다시 건너갑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유명한 이탈리아의 오페라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메리언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여기서 토스카니니는 메리언의 노래가 100년 만에 한 번 들을까 말까 한 소리라고 평을 합니다. 토스카니니의 이 논평은 세계 음악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드디어 메리언은 국제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다시 미국에 와서는 전국을 돌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1935년 메리언은 다시 한번 뉴욕 타운홀에 섰습니다.

이번에는 대 성공이었습니다. 메리언은 이제 미국 전역에서 공연했습니다. 메리언은 음악이야말로 인종차별을 무너뜨리는 최고의 무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유명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메리언 앤더슨이 워싱턴 DC의 컨스티튜션홀에서 공연을 거부당한 것입니다. 이미 계획된 음악회였는데, DRA 즉 미국 혁명의 딸들이라는 이름의 단체는 메리언 앤더슨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공연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부인 엘레노어 루스벨트 여사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항의에도 이 공연은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서둘러 링컨 기념관 앞에서의 노천 공연을 주선했습니다.

1939 년 4월 9일 이날은 부활절이었습니다. 이 공연에는 무려 7만여 명이나 되는 청중이 몰려드는 대성황이었습니다. 메리언 앤더슨은 애국적인 노래와 성가들을 불렀습니다. 흑인 백인이 어우러진 7만5천 명이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955년 메리언 앤더슨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미국 오페라 악단에서 흑인 가수가 정규 가수가 된 것은 메리언 앤더슨이 처음이었습니다.

지난 1982년 1월 뉴욕 카네기홀에서 노래하고 있는 메리언 앤더슨.

메리언 앤더슨은 일생 동안 수많은 상을 받았고, 1959년에는 미국의 유엔 친선 대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1963년에는 대통령 자유의 메달도 받습니다. 2년 후 메리언 앤더슨은 은퇴해 동북부 코네티컷 주에서 남편 오페우스 피셔와 조용한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녀는 1993년 96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문가들은 20세기 최고의 여성 알토 메리언 앤더슨이 목소리가 뛰어난 것뿐 아니라 옳은 것을 추구해 나가는 방법에서도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