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미 노동운동의 할아버지' 새무얼 감퍼스

미국 노동운동의 할아버지로 불리는 새무얼 감퍼스(Samuel Gompers). 미국 최대의 노동조합 연맹체인 'American Federation of Labor(AFL)'을 창설하고 회장직에 있으면서 미국 노동자들의 권리와 복지를 개선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소개해드리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미국 노동운동의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새무얼 감퍼스를 만나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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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새무얼 감퍼스


미국 노동운동의 할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새무얼 감퍼스, 그는 미국 최대의 노동조합 연맹체인 'American Federation of Labor', 약칭 AFL을 창설하고 그 회장직에 있으면서 미국 노동자들의 권리와 복지를 개선하는데 일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새뮤얼 감퍼스, 약칭 샘 감퍼스는 1850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이주해 살던 유대인 가문이었습니다. 샘의 부모들은 좀 더 잘살아보기 위해 영국으로 이주했지만 역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샘 감퍼스는 대단히 명석한 아이였으나 10살때, 그의 아버지는 샘에게 학교는 가지 말고 일을 해서 가정을 도우라고 했습니다. 샘은 5남매 중 장남이었는데,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데 힘을 보태지 않을 수 없었죠.

샘의 아버지는 시가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담배보다 굵고 긴 연초 말이,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나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늘 입에 물고 다녀서 유명한 것이 바로 시가인데요, 어린 샘도 아버지와 함께 시가를 만들었습니다.

샘은 시가 만드는 일이 재미있었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일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해요. 사람들은 일하면서 각자 자기가 처한 어려움을 서로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터에서의 문제점, 노동자들의 문제점을 많이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영국 생활도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샘 가족은 1863년에 미국으로 이주를 합니다. 배를 타고 7주 만에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러나 샘 가족은 아는 사람도 없고, 당장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뉴욕에서도 가난한 이미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짐을 풀고 날품팔이 노동을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뉴욕의 빈곤 지역 사람들은 겨우 입에 풀칠하기 위해 온 가족이 하루 14시간 이상씩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일터의 여건도 최악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집단으로 일하는 곳을 'sweatshop'이라 불렀습니다. sweat은 땀, shop은 일터, '땀 흘리는 일터', 그다지 나쁘게 들리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노동착취를 하는 업체를 말합니다. 요즈음도 세계 이곳저곳에서는 sweatshop처럼 일을 시킨다고 해서 인권문제로까지 거론이 되고 있지 않습니다.

샘 부자는 sweatshop을 떠나 다시 시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미국에는 ‘국제 시가 제조업자 노조’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샘도 이 조직에 가입합니다. 그러나 그때 노조라는 것이 지금처럼 강력한 것도 아니고 상설 조직도 아니었습니다. 노조가 근로자들을 위해 근무 여건의 향상이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노력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때 샘의 나이가 17살때였는데,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1년 후 아이가 태어납니다. 이제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샘은 차츰 노동자들의 근무 여건, 삶의 질, 그리고 노조의 역할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샘은 뉴욕 주변의 시가 상사를 돌면서 시가를 만들었습니다. 샘 감퍼스는 매우 손재주가 있고 성실한사람이어서 업소 주인들이 좋아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샘이 노조 운동을 하는데 아주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1873년에 독일 출신 시가 기술자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사회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사람들은 샘 감퍼스의 선생이 됐습니다. 샘이 노조에 관해 아는 지식은 대부분 이들에게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그들 선생 중에는 칼 로렐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과거 유럽에서 국제 근로자 협회, 즉 'International Workman’s Association' 지도자로 있었습니다. 로렐은 노동자의 결집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시작해, 노동조합에 관한 많은 것을 가르쳤습니다.

샘은 뉴욕 일대의 시가 노동조합을 만드는데 바로 이런 지식을 이용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가 제조업 노조 지역번호 144라는 것이었습니다. 각 시가 제조업체마다 노조 대표를 한 사람씩 정하고 이들 대표가 고용주 측과의 단체 협상에 참석하게 되는 거죠. 노조 대표들은 새 감퍼스를 노조 위원장으로 선출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시가 노조 144'를 미국 노동운동의 시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샘 감퍼스는 미국의 모든 남녀 노동자들이 언젠가는 노조에 가입하는 날이 있기를 희망했습니다. 샘은 어떤 노동자도 자신의 노동을 너무 값싸게 제공하도록 강요 받아서는 안된다고 믿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힘도 있어야 되고, 그러기 위해 노조에 가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샘 감퍼스는 노조가 최대한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도록 애썼습니다. 감퍼스는 노조 대표는 모든 노동자의 희망을 반영하도록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가 선거를 통해 국민의 대표자를 뽑아 모든 국민을 위해 일하게 하는 것처럼, 노조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노력으로 19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미국에는 많은 노조가 등장했습니다. 샘 감퍼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노조 연대를 추진했습니다. 여러 개의 노조들을 큰 조직으로 묶어서 한 목소리를 내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1881년 샘 감퍼스는 여러 노조가 모이는 회의에 시가 노조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이날 회의에서 대표들은 미국과 캐나다의 여러 노조를 연대시킨 노조 연맹을 결성하기로 합의합니다. 그리고 샘 감퍼스를 5년 임기의 중앙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했습니다.

이 기간에 샘 감퍼스는 노동자와 그 가족, 특히 자녀들의 삶을 개선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즉 하루 8시간 근무제, 어린이 노동금지, 어린 자녀들의 학교 교육 의무화 등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애로는 연맹이 말은 많이 하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길 자금이 없고 힘도 약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1886년에 샘 감퍼스는 '미국노동총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약칭 AFL이라는 새로운 전국 노조 연맹체를 추진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에 있는 수많은 노조가 가입을 하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조직이 만들어졌습니다. 샘 감퍼스는 처음 만들어진 해부터 그가 타계할 때까지 단 1년만 빼고 38년 동안 AFL 회장직에 있었습니다. 1890년에 AFL은 산하에 25만 명의 노조 회원을 갖게 됐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회원 수가 무려 1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샘 감퍼스는 단 몇 개의 부실했던 노조를 미국 최대의 노동기구로 성장시켰지만 그런 과정에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없었을까요? 노조 내외에서 비판이 많았습니다. 일부에서는 샘 감퍼스가 노조원들보다는 자신의 권한을 늘리는데 열심이었다고 비판했고, 그의 파업과 단체교섭 방식은 대기업을 설득시키는 데 효과가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AFL은 숙련공만을 위한 보수적인 조직이라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그가 외국 태생이라는 점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대기업과 산업체들은 그가 법을 어긴다, 파업을 부추긴다 등 비난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샘 감퍼스는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샘 감퍼스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파업이 필요한 것이다, 파업을 하고 나면, 고용주와 노동자는 서로를 더 잘 알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국가에도 유익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파업의 권리를 상실하는 날이 와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샘 감퍼스가 조직한 AFL은 그 후 새로 등장한 CIO와 1955년 통합됐습니다. 그 후 미국의 노조는 AFL-CIO, 즉 '노동총연맹 산업별 조합회의'라는 조직으로 이어지고 현재 가입 노조원 수는 약 1천250만 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샘 감퍼스는 유엔의 국제 노동기구라든지, 멕시코의 노조운동 등 국제적인 노동운동에도 기여하다 1924년 타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