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허쉬 초콜릿' 창업자 밀튼 허쉬

밀튼 허쉬(가운데)가 생전 펜실베이니아주 허쉬 사옥에서 고아들과 함께 한 모습. 허쉬는 초콜릿 공장 근로자들을 위한 마을을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고아들을 위해 학교를 세워 상당한 유산을 상속시켰다.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소개해드리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세계적인 초콜릿 회사 '허쉬' 창업자 밀튼 허쉬를 만나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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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쉬초콜릿' 창업자 밀튼 허쉬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허쉬 초콜릿.

미국 동부 펜실베이니아 주 소도시 허쉬에는 늘 달콤한 냄새가 감돌고 있습니다. 미국 최대의 초콜릿 캔디 제조회사 허쉬(The Hershey Company)가 있는 곳이기 때문인데요. 이곳에 있는 공장에서 허쉬 코코아, 피넛버터 컵, 트위즐러, 킷캣, 허쉬스 키스 등 80여 가지의 캔디가 연중 쉬지 않고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펜실베이니아주 허쉬에 있는 '초콜릿 애비뉴' 도로 조형물. 허쉬의 인기제품인 '키세스' 모양이다.

허쉬 사는 1년에 약 5억kg이나 되는 캔디를 만들어 세계 90여 개국 소비자들에게 공급하고 있는데요. 15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이 회사의 연 매출은 2016년 기준 74억 달러를 넘고 있습니다.

이처럼 큰 기업을 건설한 인물은 바로 밀튼 허쉬. 그는 막대한 재산을 모은 것도 유명하지만 이를 사회에 돌려준 기업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밀튼 허쉬는 1857년 펜실베이니아 주 중부 랭커스터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정은 그다지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저런 곳으로 직장을 옮겨 다녔고, 가족들도 여러 차례 이사를 다녔습니다. 부모들의 결혼 생활도 원만치 못했습니다. 서로 떨어져 산 기간이 대부분이었고 결국은 밀튼이 10살 때이던 1867년에 이혼을 합니다.

밀튼 허쉬는 12살 때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한 독일어 신문사에서 심부름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모자를 기계 속에 떨어뜨리는 사고를 내자 신문사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다음 밀튼은 랭캐스터라는 도시에 있는 캔디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 미국의 캔디 회사에서는 카카오를 원료로 하는 짙은 갈색의 초콜릿을 다른 캔디의 껍질을 씌우는 재료로만 사용을 했었습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때 초콜릿은 지금과는 달리 쓴 맛이 아주 강했다고 합니다. 밀튼은 거기서 캔디 제조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은 밀튼에게 캔디 가게를 열어보라고 권고를 했습니다. 밀튼은 18살 때 펜실베이니아 주 수도인 필라델피아에서 가게를 열었지만 6년 만에 망하고 맙니다.

밀튼은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서부의 콜로라도 주로 갑니다. 거기서 캔디 회사에 취직을 합니다. 그 회사에서 주로 만드는 건 캐러멜이었습니다. 거기서 밀튼은 캐러멜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또 좋은 캐러멜을 만들기 위해서는 신선한 우유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터득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대도시 뉴욕과 시카고에서 캔디 가게를 열었지만, 여전히 실패를 합니다. 결국 고향인 랭커스터로 빈 손으로 돌아오고 맙니다.

그러나 밀튼은 좌절하지 않고 고향에서 랭커스터 캔디회사(Lancaster Candy Company)라는 회사를 차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방법으로 캐러멜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의 경험을 살려서 신선한 우유를 사용하고, 좀더 부드러우면서도 덜 끈적거리는 캐러멜을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영국인 수입업자가 밀튼의 캐러멜을 맛보더니 많은 양을 주문을 했습니다. 그러더니 그 후로 밀튼의 캐러멜이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머지않아 밀튼의 캐러멜 회사는 펜실베이니아 주 최고의 사업체로 성장을 하고 이어 전 미국에서도 이름을 날리는 회사가 됩니다.

그때까지도 밀튼 허쉬는 초콜릿 캔디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가 밀튼 허쉬의 삶을 바꾸어 놓게 됩니다. 그 박람회에 독일에서 만든 초콜릿 기계가 선을 보였습니다. 그걸 본 순간 밀튼은 이거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래의 캔디는 초콜릿이다 라고 느낀 밀튼은 그 기계를 삽니다.

'허쉬' 로고가 새겨진 초콜릿 제품.

밀튼은 운영하던 캐러멜 회사를 팔고 전혀 새로운 대규모 회사를 차립니다. 펜실베이니아의 옥수수 농장지대에 초콜릿 공장을 차린 거죠. 그리고 그 공장을 돌릴 수 있도록 시설과 인력이 함께 있는 조그마한 도시를 하나 새로 건설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공 도시가 바로 펜실베이니아 주 허쉬입니다. 마을의 많은 건물, 주택은 밀튼 자신이 직접 돈을 내어 지었습니다. 그리고 초콜릿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나중에는 그런 집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대부분의 공장 지대 사람들이 사업주에게 세를 내면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을 없애 버린 거죠.

밀튼 허쉬는 40세가 넘은 1898년에 늦깎이 결혼을 했습니다. 부인은 캐서린 스위니라는 여성이었는데, 허쉬 집안에서는 반대가 많았습니다. 허쉬 집안은 개신교 계통의 메노나이트 신자였는데, 스위니 여인은 로마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죠.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는데, 부인은 결혼 생활 거의 내내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캐서린 허쉬는 아이가 없이 42살에 세상을 떠납니다. 부인은 죽기 전 남편과 함께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아들을 위해 전액 무료인 학교를 세우고 뿐만 아니라 이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주거지도 마련해 주었죠. 이것이 바로 밀튼 허쉬 학교(Milton Hershey School)입니다.

부인이 사망했을 때 밀튼 허쉬는 회사 주식 6천만 달러 상당을 학교 재단에 기부했습니다. 이 학교는 나중에 남녀, 종교를 막론하고 누구나 입학하는 학교로 발전했고, 집 없는 학생들을 위해서는 100여 채의 집까지 지어서 살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 후에는 또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의 의료센터도도 건설합니다. 이 의료 센터는 수준 높은 의과대학과 함께 직원 수가 5천 명이 넘는 대형 의료시설을 갖고 있습니다.

1930년대 전 미국을 강타한 대공황 때도 허쉬와 그 직원, 그리고 허쉬 마을은 타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기업이 워낙 튼튼했기 때문에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을 위기도 겪지 않았고, 오히려 큰 허쉬 호텔과 스포츠 센터를 짓는 데, 사람들을 더 고용해 일자리를 제공했습니다.

한때 전 미국 밀크 초콜릿의 90%를 생산하던 허쉬는 문화센터, 공연장, 캔디 제조과정 견학, 놀이공원 등으로 유명 관광도시가 됐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관광객은 300만 명이 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곳으로 불리는 도시, 그리고 캔디 왕국을 건설한 밀튼 허쉬는 1945년에 유산을 사회에 넘긴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허쉬도 인간이기 때문에 완전하지는 못했습니다. 노조와의 충돌 등 논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이 시대의 가장 바람직한 기업인상을 보여준 인물이라고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