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로큰롤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 (1)

'로큰롤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의 지난 1972년 공연 모습.

로큰롤의 황제라 불리는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 올해 2017년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망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엘비스가 사망한 건 1977년 8월 16일이었는데요, 미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서 그의 생애와 음악을 되돌아보는 행사가 많았습니다. 미국의 여러 방송사도 엘비스 특집을 방영했고, 그의 고향 테네시주 멤피스에는 옛집에는 그의 사망일 하루에만도 8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그를 추모했습니다.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가 생전에 살던 멤피스 '그레이스랜드' 앞에서 지난달 15일 팬들이 40주기 추모집회를 열고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보통의 가수들 같으면 단 한 곡도 기록하기 힘든 빌보드 차트 1위 곡을 모두 18곡이나 남겼고, 비틀즈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약 2억8천만 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수립했습니다. 또 모두 31편의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영화 주제 음악으로도 크게 히트한 노래들이 많죠.

엘비스 프레슬리는 1935년 1월 8일 미시시피주 터필로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정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제대로 된 집도 없이 컨테이너를 개조한 집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 버논 프레슬리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고, 술과 여자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글래디스 프레슬리는 엘비스를 무척 아꼈고, 늘 교회에 데리고 가고 함께 찬송가도 많이 불렀습니다. 어머니는 목화밭이나 콩밭에서 노동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지만, 아들 사랑이 남달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엘비스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듣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때 많이 들은 음악이 나중에 커서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엘비스 가족은 그가 13살때 멤피스로 이사를 갑니다. 엘비스는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트럭 운전사 등 노동일을 했습니다.

멤피스에는 Memphis Recording Service라는 녹음 시설이 있었습니다. 1953년, 그가 17살때, 엘비스는 어머니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자기 돈 4달러를 내고 노래를 한 곡 취입했습니다. 최초의 취입한 노래 곡목은 Happiness, 즉 행복이었습니다.

지난 1975년 여자친구 이본 라임과 함께 멤비스 집 앞에서 포즈를 취한 엘비스 프레슬리.

그런데 Memphis Recording Service에 일하던 여성이 또 다른 업체인 Sun Recording이라는 곳에 엘비스를 다리를 놓아주었습니다. Sun Recording의 샘 필립 사장은 엘비스에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 일을 주었습니다. 필립은 몇 달 후 공연 팀의 노래를 음반으로 만듭니다. 그 중 하나가 ‘That’s All Right’라는 노래였습니다. ‘That’s All Right’는 괜찮아 라는 뜻인데요, 그때 멤피스 라디오 여러 방송국에서 꽤 많이 트는 노래가 됐습니다.

샘 필립스는 엘비스의 노래를 좀 더 알리기 위해 지역 축제에 엘비스를 출연시켰습니다. 그때 엘비스의 노래를 들은 사람 중에 이 지역의 공연 프로모터인 코널 탐 파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코널이란 대령이라는 말인데, 파커는 육군 대령으로 제대한 사람이어서 그렇게들 불렀죠. 파커가 주선을 해서 엘비스는 레코드 사인 RCA와 녹음 계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1950년대 중반인데, 엘비스는 여기서 몇 곡의 노래를 취입합니다. 그 중 하나가 엄청난 히트를 기록합니다. 바로 ‘Heartbreak Hotel’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엘비스의 생애 첫 빌보드 싱글 1위를 기록합니다. 엘비스는 이어 CBS 텔레비전의 쇼 프로그램인 ‘스테이지 쇼’에 출연합니다. 그 뒤를 이어 ‘I Got A Woman’, ‘Money Honey’ 등이 담긴 정규 음반도 내놓는데, 이것도 음반 차트 1위로 올라섭니다. 엘비스의 명성은 이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음악 평론가들은 당시 흑백 차별이 아주 심하던 때인데, 엘비스는 백인의 팝과, 컨트리 음악, 그리고 흑인의 재즈에서 파생된 흥겨운 요소들을 결합시켜 큰 인기를 끌었고 또 그것이 그의 위대한 점이라고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드신 분들은 엉덩이를 매우 선정적으로 흔드는 엘비스의 로큰롤을 망측하다, 젊은이들 교육상 매우 좋지 않다고 못마땅해 했고, 반대로 대부분의 젊은이들, 특히 여성들은 그의 노래와 공연에 열광했습니다.

엘비스는 영화에도 여러 편 출연하는데요, 맨 처음 나온 영화는 1956년에 나온 ‘Love Me Tender’였습니다. 영화의 주제가, ‘나를 부드럽게 사랑해주세요’ 는 다시 빌보드 1번으로 올라가는 대 히트를 기록합니다. 이 노래는 지금까지의 노래와는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감미로운 성인 팝 스타일인데, ‘Love Me Tender’의 등장은 미국의 팝 음악과 세계의 음악 지형도를 바꾼 사건이었다는 평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때는 이미 엘비스는 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이 됐고, 공연을 할 때면 실신을 하는 10대 20대 팬들이 속출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생전에 살던 테네시주 멤피스의 '그레이스랜드' 내부에 각종 기념물들이 전시돼있다. 저택과 내부 묘소 등을 유산관리회사가 운영중이다.

그렇게 인기가 치솟자 방송사들 사이에서는 섭외 전쟁이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출연한 영화는 ‘비바 라스베이거스’, ‘아카풀코의 추억’, ‘카니발’, ‘파라다이스’ 등이 있습니다. 주로 엘비스가 노래를 부르는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작품성은 크게 인정 받지는 못했습니다. ‘비바 라스베이거스’는 가수인 앤 마거릿과 함께 출연한 영화였습니다.

그렇게 화려한 연예인 생활을 하던 엘비스도 1958년 영장을 받고 군대에 가야 했습니다. 미 국방부는 엘비스에게 연예 장병으로 복무하라고 했지만, 엘비스는 일반 사병으로 입대를 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모든 미디어는 머리를 짧게 깎고 군복을 입은 엘비스의 모습을 전하느라 분주했습니다. 팬들은 눈물을 흘리며 엘비스를 떠나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