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로큰롤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 (2)

가수 엘비스 프리슬리가 미 육군 복무 당시 정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소개해드리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로큰롤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 두번째 순서입니다.

오늘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군에 입대한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엘비스는 18개월 동안 독일에서 탱크병으로 복무했습니다. 엉덩이를 흔들면서 노래하던 가수가 탱크를 모는 것은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아무리 군대지만 엘비스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독일 사람들도 그가 가는 곳마다 몰려들어 환호했습니다. 엘비스는 한 인터뷰에서 독일에서도 미국이나 다름없이 팬들이 몰려들었다면서 자신도 그런 환호에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복무 중에는 어머니의 타계로 큰 충격을 받았고, 그런가 하면 장차 부인이 될 여성 프리실라를 만납니다. 프리실라는 미 육군 장교의 딸이었습니다. 그때 프리실라의 나이는 겨우 14살. 엘비스는 1960년에 제대를 하고 고향 멤피스로 돌아올 때 프리실라도 데리고 왔습니다.

두 사람은 1967년 결혼했습니다. 프리실라 21살, 엘비스는 32살 때였죠. 그리고 10달 후 딸 리사 마리가 태어났습니다. 이때 태어난 리사 마리가 나중에 또 한명의 젊은이들의 우상 마이클 잭슨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엘비스는 제대 후에도 인기에 변함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노래를 발표합니다. ‘It’s Now or Never’ ‘Are You Lonesome Tonight’이 차례대로 빌보드 차트의 싱글 부문 1위를 차지합니다.

제대 후 영화 출연 요청도 계속 들어왔습니다. 제대 후 출연한 첫 번째 영화는 군인의 공익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G.I. Blues’. 제대한 1960년에 개봉된 영화인데,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또 음반 차트 1위를 차지했습니다.

다음 해인 1961년은, 영화 ‘Blue Hawaii’의 열기로 가득 찬 해였습니다. 영화도 흥행에 성공을 했지만 주제가 ‘Blue Hawaii’가 빌보드 차트에서 20주간이나 1위를 차지했고, 상위 10 위권에서는 39주간을 머물렀습니다. 달콤한 목소리로 부른 그 유명한 ‘Can’t Help Falling in Love’는 1961년 6월에 발표한 음반에 들어있는 노래였습니다.

엘비스는 1960년부터 1967년까지 단 한 차례의 콘서트만 치른 채 영화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1968년 12월 3일, 미국의 NBC 방송국이 엘비스의 음악 무대 복귀 프로그램을 특집 방송으로 편성했습니다. 미국 전역에 방영된 이 프로는 42%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이 방송으로 엘비스는 노래로 돌아오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어서 세계적인 오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도 정기적으로 공연을 합니다. 라스베이거스는 미국 서부 반 사막지대인 네바다 주에 인공적으로 만든 오락과 연예, 도박의 도시. 여기서도 엄청난 인파를 끌어모았습니다. 1969년 7월에는 4주간 총 57회의 공연을 했는데, 관객이 무려 13만 명이나 됐습니다.

지난 1970년 백악관에서 리처드 닉슨(왼쪽) 대통령을 만난 엘비스 프레슬리.

무엇보다도 유명한 공연은 1973년 1월에 있었던 하와이 공연이었습니다. 73년 1월 14일, 하와이에서 ‘Aloha from Hawaii’라는 TV 쇼 공연이 열렸는데, 인공위성으로 전 세계에 생중계가 됐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 30개국을 비롯해 일본·한국·필리핀·홍콩·베트남 등 40여 개국으로 중계가 됐습니다.

이때 생중계를 시청한 사람의 수는 10억 명으로 추산됐습니다. 아폴로 11호로 인간이 처음으로 달에 착륙하는 장면을 지켜본 시청자가 6천만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인기입니다. 이 공연은 인공위성을 통한 최초의 생중계였다는 점에서 방송 역사상 중요한 이벤트이기도 했습니다.

하와이 공연 후로는 이처럼 큰 무대가 없었고 새로운 곡도 별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공연 때마다 인기는 여전했습니다. 워낙 히트한 곡이 많아서, 부를 노래가 없어 고민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엘비스는 음악계 최고의 상으로 알려진 그래미상을 3회나 받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처음 그래미상을 받은 노래가 ‘How Great Thou Art’라는 찬송가였습니다.

엘비스는 이 무렵부터 건강에 이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수면제를 먹기 시작했고 몸 무게가 불어 살 빼는 약도 먹었습니다. 통증을 가라 앉히기 위해 매우 강력한 진통제도 복용했습니다.

결혼 생활도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엘비스는 라스베이거스에 있을 때나 공연 여행을 갈 때 부인 프리실라와 절대 동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 프리실라가 집에 있을 때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결혼 생활은 파탄이 나고 1972년 프리실라는 엘비스를 떠났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엘비스는 극도의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엘비스가 마지막 낸 음반은 ‘Moody Blue’라는 음반이었고 그중 히트한 곡은 내려간다는 의미의 ‘Way Down’이었습니다. 어쩌면 그의 인생이 종착점을 향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테네시주 멤피스 '그레이스랜드' 저택 안에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 묘비.

엘비스는 1977년 8월 16일 테네시 주 자택에서 숨졌습니다. 처음 보도는 그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부검 결과 여러 가지 약물이 체내에서 검출됐습니다. 어떤 전문가들은 약물을 너무 많이 복용해 숨진 것으로, 또 어떤 전문가들은 변비로 인한 사망으로 분석을 하고 있으나 그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못했습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대중문화의 우상, 엘비스 프레슬리는 멤피스 그레이스랜드(Graceland)에 있는 그의 저택에 안장돼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에게는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보다 더 많이 찾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타계한 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60만명이 넘는 팬들은 이곳을 찾아 그를 추모하고, 그의 노래는 세계 여러 곳에서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생전에 살던 테네시주 멤피스 '그레이스랜드' 방문 가족이 입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