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홈런왕' 베이브 루스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강타자 베이브 루스가 지난 1923년 뉴욕 양키스에서 활약하던 당시 모습.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소개해드리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메이저리그 야구의 전설적인 홈런타자 베이브 루스를 만나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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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왕' 베이브 루스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의 하나인 야구. 그 중에서도 최대의 흥미거리는 프로 구단들로 구성된 야구 조직 메이저 리그(Major League Baseball) 경기입니다. 1년 동안 메이저 리그 경기를 관전하는 사람의 수는 경기장 입장객과 텔레비전 중계를 보는 사람까지 합쳐 약 10억 명에 달합니다.

미국 프로 야구 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는 찬사를 받는 홈런 왕 베이브 루스는 오랫동안 뉴욕 양키스 팀에서 활약한 선수였습니다. 선수 생활 중 홈런을 무려 712개나 쳤으니 홈런왕이라는 찬사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홈런이란 타자가 친 공이 경기장을 넘어 관중석으로 날아가거나 아예 경기장 건물 밖으로 넘어간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팔의 힘, 속도, 그리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것이 홈런입니다. 홈런을 치면 자신이 한 점을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1, 2, 3루에 선수들이 나가 있었다면 그들까지 싹쓸이해 점수를 내도록 만들기 때문에 야구의 최고 매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뉴욕 브롱크스에 있는 양키스타디움 방문객이 베이브 루스 기념 동판을 만져보고 있다.

베이브 루스의 본래 이름은 조지 허만 루스였습니다. 1895년 미국 동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길거리에서 싸우다가 사망하는 등 불우한 가정이었습니다.

어린 조지 허만 루스는 볼티모어의 길거리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물건도 훔치고 다른 아이들과 싸움도 했습니다. 조지 루스는 8살때 남학생들만 들어가는 성마리아 공업학교로 보내졌습니다. 이 학교는 가톨릭 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거기서 먹고 자고 공부도 했습니다. 이곳 선생님들은 조지 허만 루스에게 행동을 바르게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루스에게 야구를 가르친 건 이 학교의 선생님들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의 지도와 자신의 노력 등으로 18살 때에는 아주 뛰어난 야구 선수가 돼 있었습니다. 이 학교에는 볼티모어 오리올스 마이너 리그의 매니저와 친구 사이인 선생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이 선생님은 1914년 매니저 잭 던에게 학교에 와서 이 젊은 선수가 야구하는걸 한 번 보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루스는 야구팀의 투수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공을 던지는 수비팀의 역할입니다. 잭던은 학교에 와서 루스의 경기 모습을 보더니 자기 팀에 와서 6개월 동안 왼손잡이 투수로 뛰어보라고 제의를 했습니다.

잭 던이 아직 어린 조지 허만 루스를 데리고 오자 오리올스의 선수들이 “Dunn’s babe” 즉 “던의 아기”라고 놀렸습니다. 그때 놀리던 말이 조지 허만 루스의 새로운 이름, 즉 아기 루스라는 이름으로 굳혀지게 됐습니다. 그 해 또 다른 프로 야구 구단인 보스톤 레드삭스가 베이브 루스와 전속 계약을 체결합니다. 그 후 2년 동안 베이브 루스는 보스톤 레드삭스의 투수로 활약을 합니다.

메이저 리그는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 양대 산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야구 팀은 미국 팀이 29개, 캐나다 팀 1개로 모두 30개가 있고, 각각 뉴욕, 시카고, 신시내티 등 여러 도시를 본거지로 삼고 있습니다. 이들 팀은 봄부터 가을까지 모두 150회의 경기를 벌입니다. 두 리그는 각각 챔피언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두 리그의 챔피언들끼리 또 시합을 해서 이긴 팀이 전국의 왕좌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치르는 전국 왕좌 결정전을 월드 시리즈라고 합니다.

베이브 루스가 소속된 보스턴 레드삭스는 아메리칸 리그 소속이었습니다. 베이브 루스는 리그의 모든 팀 중에서 가장 뛰어난 투수가 됐습니다. 그런데 보스턴 레드삭스는 베이브 루스가 공을 던지는 것, 즉 투수보다는 공을 방망이로 치는 것 즉 타자로 더 뛰어낸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베이브 루스는 타자로 변신을 했습니다.

1919년 베이브 루스는 공을 경기장 밖에까지 날아가는 홈런을 29번이나 쳤습니다. 보통 선수들에게는 한 번도 치기 어려운 것이 홈런인데, 29번의 홈런은 그 해 어떤 선수보다 많은 수였습니다.

1920년, 베이브 루스는 레드삭스에서 뉴욕 양키스팀으로 적을 옮깁니다. 물론 이럴 때 영입하는 구단은 유명 선수에게 고액의 연봉을 주는 것이 보통입니다. 뉴욕 양키스로 간 베이브 루스는 그해 홈런을 54개나 칩니다. 그다음 해에는 59개로 홈런이 늘어납니다. 베이브 루스는 이제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야구선수가 됐습니다.

베이브 루스가 지난 1920년 뉴욕 양키스 이적 직후 옛 양키스타디움에서 타격 연습을 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이 베이브 루스가 뛰는 경기를 보기 위해 야구장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뉴욕 양키스는 베이브 루스 덕분에 많은 돈을 벌게 됐습니다. 그 바람에 뉴욕 양키스는 새로운 야구 경기장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경기장은 베이브 루스가 지은 곳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관중들은 그가 홈런을 칠 때면 너무 흥분해서 관중석 의자가 부서질 정도였습니다. 1920년에는 그의 팬 한 사람이 베이브 루스의 홈런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관중석에서 숨지기도 했습니다. 뉴욕 양키스 팀은 베이브 루스 덕에 챔피언을 여러 차례 차지했습니다. 리그 챔피언이 3차례, 월드 시리즈 챔피언이 4차례나 됐습니다. 1927년에는 무려 60개의 홈런을 쳤습니다.

그가 일생 동안 친 홈런은 모두 712개나 됐습니다. 돈도 꽤 많이 받았습니다. 1930년에 그가 받은 연봉은 8만 달러였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보다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기자들이 베이브 루스에게 왜 대통령보다 많은 돈을 받느냐고 묻자 그는 “왜 안돼요? 나는 그 양반보다 더 잘했잖아요?”라고 응수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경제난 때문에 후버 대통령이 일을 잘 못한다고 비판을 많이 받던 때여서 그렇게 농담을 한 것이었습니다.

베이브 루스라는 이름이 많이 잘 알려지자 베이비 루스 캔디 바라는 과자처럼 그의 이름을 빌린 상품도 여러 가지가 나왔습니다.

베이브 루스는 말썽도 많이 일으켰습니다. 종종 경기 시간에 늦게 나와 팀을 초조하게 했고 걸핏하면 심판과 말다툼을 했습니다. 말썽을 자주 일으키자 1921년 양키스 매니저는 베이브 루스에게 출전 정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도 그 다음해에는 경기 도중 자기를 야유하는 한 팬을 잡으러 스타디움을 빠져 나가버린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베이브 루스는 5천 달러의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거금이었습니다.

경기가 없을 때도 말썽이 많았습니다. 베이브 루스는 뚱뚱한 편이었는데, 음식도 많이 먹고 술도 많이 마셨습니다. 도박을 해서 돈을 잃기도 했습니다. 나이트 클럽에도 자주 드나들고 운전을 거칠게 했습니다.

그런 베이브 루스였지만 진정어린 충고에는 머리를 숙였습니다. 1922년 뉴욕주의 지미 워커 상원의원이 한 공식 석상에서 그에게 전국 어린이들의 모범이 되도록 행동을 조심해 달라고 부탁하자 일어서서 그 말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다음부터 베이브 루스는 정말 딴 사람처럼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지난 1924년 11월, 고아 출신으로 야구 스타가 된 자신의 이야기를 어린이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베이브 루스(가운데).

베이브 루스는 야구 재능도 재능이지만 성격도 호탕해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시간이 나면 곧잘 어린이들과 어울리고, 아픈 아이들을 위해 병원도 자주 찾아갔습니다.

1926년 자니 실베스터라는 어린아이가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큰 수술을 받은 이 어린이는 너무 쇠약해져 회복이 어려웠습니다. 이때 의사가 만약 이 아이의 영웅인 베이브 루스가 찾아온다면 아이는 회복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베이브 루스는 병원으로 이 어린이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야구공에 자신의 이름을 써서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너를 생각하며 꼭 홈런을 치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날 오후 베이브 루스는 정말로 홈런을 한 개도 아니고 세 개나 쳐 약속을 지킵니다. 그리고 그 어린이는 기적적으로 병을 회복했습니다.

베이브 루스가 선수로 뛴 것은 1935년 40세 때까지였습니다. 그 다음해 베이브 루스는 야구 명예의 전당에 처음으로 헌정된 5명의 선수 가운데 한 사람이 됐습니다. 베이브 루스는 선수 생활을 마치고 야구 감독이 되기를 바랐지만 그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53세 때인 1948년에 지병인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베이브 루스는 뉴욕시 부근에 묻혀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묘소를 찾아와 야구 모자, 미국 국기, 야구공 등을 놓고 갑니다. 미국인들은 잠든 베이브 루스에게 우리는 지금도 이렇게 당신을 잊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