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이상적 사회주의 국가로 신봉하며 1970년 평양을 방문했던 전 흑인인권 운동가가 북한의 현재 인권 상황을 '악몽'으로 규정했습니다. 흑인해방을 기치로 내걸었던 무장조직 ‘블랙팬더’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1980년대 인권 변호사로 변신한 캐슬린 클리버 씨는 ‘VOA’와의 인터뷰에서 46년 전 ‘스탈린식 스위스’로 알았던 북한이 끔찍한 경찰 국가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부인 김성애는 1970년 만삭의 몸으로 평양에 들어와 출산한 클리버 씨를 만나 딸에게 ‘조주 영희’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예일대 법과대학원을 거쳐 현재 에모리 법과대학원에 재직중인 클리버 교수를 김영남 기자가 인터뷰했습니다.
기자) 블랙팬더가 북한과 처음 접촉하게 된 계기는 뭔가요?
클리버 교수) 블랙팬더 최고 지도부 일원이었던 전 남편 엘드리지는 미국에서 경찰 살해 사건에 연루돼 1969년 알제리로 피신했습니다. 당시 알제리에서 ‘범아프리카문화제’가 열렸는데, 거기서 알제리 주재 북한 대사를 만났죠. 이를 계기로 엘드리지는 그 해 북한을 처음 방문했습니다. 이듬해 북한에서 반제국주의 기자 총회가 열렸는데 엘드리지가 이에 참가할 미국 대표단 15명을 조직했고 북한과 중국, 베트남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회의는 김일성을 서방 세계에서 어떻게 보는지 논의하는 자리였는데, 블랙팬더가 운영하는 신문이 관련 기사를 썼기 때문에 초청된 겁니다.
기자) 남편과 함께 북한을 방문한 건 언제였습니까?
클리버 교수) 딸아이 생일이 1970년 7월 31일이니까 그 즈음입니다. 저는 만삭 상태였고 북한에 들어가 아이를 낳았죠. 엘드리지가 대표단을 꾸릴 당시 저는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저 혼자 알제리에 남아 출산하는 걸 원하지 않아 알제리주재 북한 대사관을 통해 저를 초청하도록 했습니다. 북한에선 8~9주 정도 있었습니다.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출산일 10일 전부터는 병원에 있었고 이후에는 회복절차를 받았습니다. 이때 김일성 주석의 부인인 김성애를 만났습니다.
기자) 김성애는 어떻게 만났습니까?
클리버 교수) 제가 머물던 초대소에 찾아왔습니다. 매우 외교적이고 격식을 차린 자리였습니다. 저와 친해지려고 찾아온 게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제가 블랙팬더라는 단체의 대표로 북한에 온 손님이었기 때문에 저를 만난 거죠. 북한에서 태어난 제 딸 이름은 ‘조주 영희’입니다. 제가 고른 이름도 아니고 저는 무슨 뜻인지도 몰랐습니다. 김성애가 직접 지어줬고 뜻은 “주체 조선에서 태어난 젊은 여자 영웅’이라고 했습니다.
기자) 따님이 아직도 그 이름을 사용하나요?
클리버 교수) 네. 줄여서 ‘조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름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요? 여자들은 특별한 이름을 사용하는 걸 좋아합니다.
기자) 북한에서의 체류는 어땠습니까?
클리버 교수) 외딴 초대소에 머물렀기 때문에 제대로 경험하진 못했습니다. 제가 머문 곳은 호텔처럼 요리사와 운전사, 통역사, 그리고 보모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한 노동당 소속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제 통역사가 이 사람하고 말다툼을 하다 울더군요. 당시 저희는 해외에서 가져온 잡지와 신문들을 통역하는 여성에게 보여줬습니다. 아마 이 때문에 논쟁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당시에도 정보는 엄격히 통제됐고 평양에서 발행되는 신문에는 어떤 정보도 없었습니다.
기자) 전 남편 엘드리지는 왜 주체사상에 빠지게 됐습니까?
클리버 교수) 그는 놀라울 정도로 감명을 받았습니다. ‘자립’이라는 개념은 당시 미국 흑인들에게 매우 잘 맞았습니다. 식민지 지배자나 노예주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의존한다는 뜻이니까요. 독립적이라는 거죠. 그는 주체사상의 이련 개념에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기자) 당시 교수님도 주체사상에 끌리셨나요?
클리버 교수) 저는 엘드리지만큼은 이 이념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시 이미 매우 독립적이었고 감옥에 간 적도 없었습니다. 엘드리지는 수배자였고 미국 여권도 없었지만, 저는 여권도 있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기자) 미국 흑인과 주체사상이 잘 맞았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클리버 교수) 흑인들은 ‘주체’를 실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노예제가 폐지된 뒤 흑인 단체들은 자립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흑인들은 심각할 정도로 남에게 의존했었죠. 노예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1960~70년대에는 각종 차별이 많았고, 우린 남에게 의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또 그 당시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에서 반식민주의 운동이 매우 중요하게 비쳐졌던 것도 이유였습니다.
기자) 블랙팬더에서 어떤 일을 맡았습니까?
클리버 교수) 공보담당으로 보도자료를 배포하거나 홍보하는 일이었습니다. 블랙팬더에는 바비 실 총재가 있었고 국방담당에 휴이 뉴튼, 문화담당에 에밀리 더글라스, 그리고 정보담당을 전 남편 엘드리지가 맡고 있었습니다. 당시 공보담당 자리가 공석이었기 때문에 제가 맡게 된 겁니다.
기자) 블랙팬더를 북한과 손잡았던 폭력 단체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요.
클리버 교수) 블랙팬더는 정당방위를 우선시했고, 그랬다고 해서 꼭 폭력적이었다고 할 순 없습니다. 그들을 폭력적으로 보는 이유는 마틴 루터 킹 등 기독교인들이 이끈 흑인 단체와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독교 중심 단체들은 비폭력적으로 시위나 집회를 여는 방법을 연구한 반면, 블랙팬더는 자신들을 방어하는 방법에 집중한 거죠.
기자) 군사훈련을 하기도 했습니까? 북한에서 훈련을 받았다는 루머도 있는데요.
클리버 교수) 군사훈련을 한 건 맞습니다. 또 당시 블랙팬더가 활동하던 캘리포니아 주에선 총기 소지가 완전히 합법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북한에선 군사훈련을 받지 않았습니다.
기자) 소위 미국 제국주의와 맞서기 위해 북한과 손을 잡았다는 일각의 평가에는 동의하시는지요?
클리버 교수) 그런 배경 때문이었던 게 맞습니다. 미국은 북한을 좋게 보지 않았고 한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죠. 당시는 공산국가들이나 이를 지지하는 국가들이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와 갈등을 빚었던 시기였습니다.
기자) 블랙팬더를 공산주의자들 모임으로 볼 수도 있나요?
클리버 교수) 아닙니다. 블랙팬더는 자기 방어와 자립이라는 가치를 추구한 것이지, 꼭 공산주의자라고 할 순 없습니다. 물론 블랙팬더는 현실에 순응하지 않았고 비폭력을 추구한 다른 흑인 단체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기자) 북한을 ‘스탈린식 스위스’에 비교한 적이 있으신데요.
클리버 교수) 저는 스위스에서도 살아봤는데 스위스는 매우 조용하고 깨끗합니다. 제가 본 당시의 북한은 매우 제한적일 수 있지만 스위스처럼 매우 조용하고 깨끗하며 질서정연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물론 스위스와 달리 공산주의국가이기 때문에 스탈린식 스위스라는 표현을 썼던 거죠.
기자) 그 뒤 인권 전문 변호사이자 법대 교수로 변신하셨는데, 지금은 북한을 어떻게 보십니까?
클리버 교수) 김일성의 손자 이름이 뭐였죠? 제 생각에 김일성은 그 사람 때문에 매우 부끄러울 겁니다. 제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김일성은 존경 받는 지도자였습니다. 바보 같은 모습도 없고 매우 진지했죠. 이젠 그 누구도 ‘스탈린식 스위스’라는 말을 쓰지 못할 거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 사람(김정은)이 형(김정남)도 죽이지 않았나요? 제가 1970년대에 경험한 북한은 지금과 전혀 달랐던 것 같습니다.
기자) 1998년 사망한 전 남편 엘드리지가 지금 북한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클리버 교수) 잘은 모르겠지만 현재 북한은 끔찍한 경찰 국가 같습니다. 주민들은 탈출하려 하고 탈출한 죄로 죽임을 당합니다. 북한은 어느 누구도 살고 싶어하지 않는 곳 같습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 곳에 살고 있고, 선택권이 있다면 다른 곳으로 갈 것 같습니다. 매우 이상한 기분입니다. 지금의 평양은 제가 방문했을 때의 평양과 너무 다릅니다. 이제는 그저 이상한 사회가 됐고, 제가 46년 전 만난 사람들과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현재 제가 접하는 정보만 보면 북한은 인권문제의 악몽입니다. 군사 독재국가라고 해서 꼭 국민들이 굶주리고 목숨이 위험하거나 지도자가 미치광이일 필요는 없습니다. 같은 군사 독재국가라고 해도 차이가 있습니다.
70년대 흑인해방 무장조직 ‘블랙팬더’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했던 캐슬린 클리버 에모리대 법과대학원 교수로부터 당시의 경험과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한 견해를 들어봤습니다. 대담에 김영남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