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모든 유산을 자선사업에 남긴 부호,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 

[인물 아메리카] 모든 유산을 자선사업에 남긴 부호,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소개해드리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오늘은 세브란스 병원을 세우고 세상을 떠날 때는 모든 재산을 자선사업에 기부한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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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모든 유산을 자선사업에 남긴 부호,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

세계적인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 창업과 그 외 여러 사업을 통해 많은 재산을 모은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 그러나 세상을 떠날 때는 모든 재산을 자선사업에 기부한 인물입니다. 세브란스는 조선의 초기 서양 의료원 세브란스 병원을 설립한 공로자이기도 합니다.

1900년, 4월 30일 뉴욕 카네기홀에서는 만국 선교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 대회의 의료분과회의에서는 조선에서 의료선교를 하던 올리버 R. 에이비슨 박사의 연설이 있었습니다. 에이비슨 박사는 1893년부터 서울에 있는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 원장이었습니다.

1885년에 설립된 제중원은 운영권이 미국 북 장로회로 이관돼 서양 의료 선교사들이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에이비슨 박사의 강연은 ‘조선에 몇 개의 진료소가 있으나 자금이 부족해 건물, 장비, 인원 등에서 어려움이 많다. 만약 규모가 좀 더 큰 병원을 지어 의료인들이 한 곳에서 진료할 수 있게 된다면 그 효과가 크게 높아질 것이다’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세브란스는 에이비슨 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 병원을 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세브란스는 강연이 끝난 후 에이비슨 박사를 별도로 만나 서울 사정과 병원의 필요성에 대해 자세히 물었습니다. 이때 에이비슨 박사는 최소한 환자 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 있기를 희망한다며, 건설 비용이 1만 달러는 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1만 달러면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한국 돈 1천억 원이 넘는 규모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세브란스는 얼마 후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에 병원 건립비 1만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에이비슨 박사는 그 후 미국에서 열린 교회 모임에서 세브란스를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이 자리에서 에이비슨 박사는 큰 자금을 지원해준 데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때 세브란스는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행복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는 일본이 조선에 깊이 개입을 하던 때였고 외국 선교사들이 일하는데도 제약이 많았습니다. 고종 황제는 병원 건설계획을 듣고 장소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나라 살림을 일제가 조종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지를 불하 받는 일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브란스는 5천 달러를 추가로 지원해 직접 대지를 매입하도록 했습니다.

지금의 서울역 앞 도동에 땅을 사서 건축 공사가 진행됐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거쳐 드디어1904년 9월 23일, 지상 2층 지하 1층 40개 병상의 서양식 병원이 준공이 됐습니다. 이 병원은 지원자인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의 이름을 따 세브란스 병원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3년 후인 1907년 9월에 처음 병원을 방문한 세브란스는 다시 3만 달러를 더 지원해 의대를 짓도록 했습니다. 세브란스는 여러 곳에 지원했지만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에 특히 애정과 자부심이 많았습니다.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는 1838년 8월 1일 미국 중부 대 평원지대인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솔로몬 세브란스는 그가 태어나기 한 달 전에 사망했습니다. 혼자가 된 어머니 매리 솔로몬은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 살았습니다. 세브란스의 외할아버지인 데이비드 롱은 당시 클리블랜드 최초의 의사였습니다. 세브란스 쪽이나 외가 쪽이나 의사들이 많았습니다.

세브란스의 성격 형성은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어머니 매리 솔로몬은 기독교, 특히 장로교 선교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자선 활동도 많이 했고, 사회 현상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노예 반대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세브란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살 때 내셔널커머셜(National Commercial) 은행에 취직했습니다. 남북 전쟁이 최고조에 달한 당시 세브란스는 1863년 방위군에 지원해 100일간 수도 워싱턴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록펠러는 세브란스가 살던 지역에서 석유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세브란스가 일하는 은행에 융자를 신청했습니다. 융자 업무를 담당했던 세브란스는 자연스레 록펠러와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다 세브란스는 자신도 석유개발 사업에 뛰어들어, 스탠다드 오일의 동업자가 됐습니다.

스탠다드 오일은 한때 미국 석유사업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세브란스는 스탠다드 오일의 첫 재무이사가 됐습니다. 이외에도 세브란스는 석유 붐이 일고 있는 펜실베이니아 주 티터스빌(Titusville)에서 석유를 정제하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세브란스는 정유 사업으로 더 큰 부를 쌓았습니다.

유황, 소금, 철 등을 채굴하는 사업도 했습니다. 세브란스는 지하에서 캐낸 광물에서 유황을 추출하는 가공법의 특허권을 확보하면서 역시 많은 돈을 벌게 됐습니다. 재혼을 통해서도 부가 크게 늘었습니다. 세브란스는 은행에 다니던 1862년 패니 베네딕트(Fanny Benedict)라는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패니는 1남 2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브란스는 1894년 은퇴를 하고 플로렌스와 재혼을 했습니다. 플로렌스는 스탠다드 오일에서 두 번째로 많은 주식을 가진 집안의 외동딸이었습니다. 플로렌스 부인은 결혼한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세브란스는 부인의 유산을 이어받았습니다.

세브란스는 선교 단체, 특히 장로교 해외 선교 활동, 교육기관, 병원 등에 많은 기부를 했습니다. 기독교청년회 즉 YMCA, 우스터컬리지, 오벌린컬리지, 웨스턴리저브 등 대학에도 많은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국가별로는 한국을 포함해 중국,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폭넓게 지원을 했습니다.

세브란스는 1913년 6월 25일 사망했습니다. 세브란스는 세상을 떠날 때 자신 명의의 집 한 채 없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오히려 아들에게는 기부 약정을 적은 수첩을 건네주면서 그 약속을 꼭 지키라고 당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 존과 딸 엘리자베스 프렌티스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자선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존과 엘리자베스는 후손이 없어, 사후에도 지원이 계속되도록 세브란스 기금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믿음으로 세상을 산 세브란스는 머나먼 낯선 땅에서 수많은 사람을 치유하고 세계적인 대형 의료기관을 태동시키는 기적을 일구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