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미디어 기업의 거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지난 1937년 5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3살된 손자 존 랜돌프 허스트 주니어를 안고 있다.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소개해드리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오늘은 미디어 기업의 거인으로 불리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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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미디어 기업의 거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일으킨 기업 ‘허스트 커뮤니케이션(Hearst Communications)’은 뉴욕에 본부를 두고 산하에 360여 개 사업체를 갖고 있습니다. 허스트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휴스턴 크로니클 등 유명 일간 신문 17개, 주간지 57개, 코스모폴리탄, 에스콰이어 등 세계적인 구독자를 갖고 있는 잡지들, A & E, ESPN 등 TV 방송 6개, 라디오 방송 7개, 통신사, 영화사, 인터넷 사업, 월트 디즈니, 스포츠 구단, 금융업체, 건강 의료 관련 사업, 등 다양한 업체의 단독 또는 공동 소유주입니다. 2016년 허스트 사 수입은 108억 달러 규모였습니다.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186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습니다. 광산으로 부자가 된 집안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돈과 시간을 불쌍한 사람들에게 많이 제공한 자선사업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허스트는 어려서 부러울 것이 없는 시절을 보냈습니다. 1885년 허스트는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지만, 도전적 기질을 갖고 있던 그는 교수를 놀린 사건으로 퇴학을 당했습니다.

허스트는 하버드 대학에 다니면서부터 신문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조지 허스트는 아들이 광산을 운영하기를 바랐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San Francisco Examiner) 신문을 운영하고 있던 조지 허스트는 1887년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됐습니다. 그러자 당시 나이가 23살밖에 안 된 아들 윌리엄 허스트한테 신문사 경영을 맡겼습니다.

윌리엄 허스트는 사업가로서의 경험은 없었지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신문을 만들고 싶다는 의욕을 갖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을 신문에 쏟으면서 최고의 월급을 주고 뛰어난 기자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신문 광고주들과의 관계도 개선하는 데 애를 썼습니다.

그 결과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의 기사는 그전보다 힘이 있고 흥미로워졌습니다. 어떤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또 어떤 이야기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야기는 읽기에 쉽고 편했습니다. 1891년까지 이 신문의 구독자와 광고주는 허스트가 아버지로부터 인수받았을 때 보다 세 배나 늘어났습니다.

허스트는 독자를 모을 수 있다면 어떤 기사든 좋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원칙은, 뉴스는 완전하게 써라, 모든 뉴스는 다 실어라, 필요하면 이야기를 줄여라, 그러나 요점을 그 안에 넣어라,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런 원칙은 이후 미국 여러 신문 편집실의 기본 방침이 됐습니다.

허스트는 어머니로부터 500만 달러를 빌려 두 번째로 ‘뉴욕 저널’이라는 신문을 사들였습니다. 허스트는 당시 뉴욕의 또 다른 신문 ‘뉴욕 월드’의 조셉 퓰리처와 극심한 경쟁을 벌이게 됐습니다. 사람들은 이 경쟁을 신문 전쟁이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허스트는 기자들의 월급을 두 배로 올려주면서 여러 명의 유능한 퓰리처 쪽 기자들을 영입했습니다. 그리고 신문 구독료를 퓰리처 신문보다 낮추었습니다. 허스트는 이 신문을 매입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판매 부수를 3만 부에서 무려 10만 부로 늘려놓았습니다.

허스트 신문은 독자들이 보다 흥미 있고 재미있어 하는 기사, 오늘날 황색 저널리즘이라고 불리는 기사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기사들은 사실보다 과장된 내용으로 돼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허스트의 기사가 오락거리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허스트는 또 대기업이나 부패한 정치인을 신문을 통해 공격했습니다. 섹스, 살인, 기타 각종 범죄에 관한 기사도 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신문은 노동자, 가난한 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매체가 됐습니다.

허스트는 계속 신문과 잡지를 새로 출범하거나 매입해 신문 재벌로 부상했습니다. 그는 영향력이 커지자 정치에도 뛰어들었습니다. 허스트는 1903년 뉴욕 출신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돼 1907년까지 연임했습니다. 1904년에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뉴욕 주지사, 뉴욕 시장 등에도 출마했으나 낙방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허스트의 기업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미국은 물론 해외의 신문, 잡지사도 계속 사들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사, 영화사까지 매입했습니다. 허스트와 그의 부인 밀리센트는 1903년 결혼해 5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밀리센트가 사망할 때까지 유지가 됐습니다.

그러나 허스트는 거의 30년 동안이나 할리우드 여배우 매리온 데이비스와 캘리포니아 주 샌시메온에서 이중 생활을 했습니다. 1917년 그녀를 처음 만난 허스트는 오직 매리온을 위해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정도로 그녀를 가까이 했습니다.

허스트는 샌시메온의 초호화 저택을 짓는데 3천만 달러를 투입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 중간 서해안에 있는 이 저택은 워낙 크고 화려해서 허스트 성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허스트는 값비싼 예술품을 구입하는데도 많은 돈을 투자했고 그런 물품을 집에 가득 전시했습니다. 허스트와 매리온은 그 집에 유명 인사들을 초대한 화려한 파티를 자주 열었습니다.

허스트는 지나친 소비로 1930년대 출판업이 위기에 빠졌습니다. 따라서 많은 부동산과 예술품을 매각해야 했습니다. 2차 대전 후 경제가 회복되는 바람에 허스트는 미디어 기업들은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허스트는 샌시메온에 있는 저택을 주 정부에 기증했습니다. 그 덕에 많은 역사적 예술품들이 공공 재산이 됐습니다. 이 저택은 많은 관광객이 구경을 가는 캘리포니아 주의 명소로 꼽히고 있으며 방문객은 연간 약 100만 명에 달합니다.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1951년 88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당시 그는 많은 재산을 잃은 상태였지만 여전히 미국 최대의 신문경영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허스트 커뮤니케이션’은 지금도 그의 후손들이 이어받아 경영을 계속하고 있으며, 여전히 세계적인 미디어 기업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