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소개해드리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오늘은 경이적인 기록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 희귀병으로 세상을 떠난 미국 프로 야구 선수 루 게릭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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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적인 기록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 희귀병으로 세상을 떠난 미국 프로 야구 선수 루 게릭, 그러나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행운아”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스타디움을 떠나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루 게릭은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의 선수 생활을 빼고 16년 동안 프로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1923년부터 1939년까지 루 게릭은 오직 뉴욕 양키스 소속으로만 활동했습니다. 왼손잡이 타자였고 주 포지션은 1루수였습니다. 루 게릭은 프로 선수로 활약하는 동안 히트가 2천721개, 홈런이 493개, 타율이 3할 4푼으로 뛰어난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그가 소속한 뉴욕 양키스팀이 월드 시리즈에서 6번이나 챔피언 자리를 차지한 데는 그의 활약이 큰 힘이 됐습니다. 그는 최우수 선수들로만 구성되는 올스타팀에 7년 연속 선정이 됐고 아메리칸 리그 최우수 선수로도 두 번이나 뽑혔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유명한 건 2천 회가 넘는 연속 출전이란 기록입니다. 그의 마지막 시즌인 1939년 루 게릭은 2천130회의 연속 출전 기록을 수립했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출전기록에 그에게는 철마, ‘Iron Horse’라는 별명이 따라다녔습니다. 그 후 56년 동안 이 기록을 깬 선수가 없었습니다.
그 기록은 1995년 볼티모어 오리올스팀의 칼 립킨에 의해 갱신이 됐습니다. 루 게릭은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뉴욕 양키스는 그의 유니폼 번호 4번을 이후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의 영구결번입니다.
루 게릭은 1903년 6월 19일 뉴욕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독일계 이민자인 하인리히 게릭, 어머니는 크리스티나 게릭이었습니다. 가난했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집안이었습니다.
루 게릭은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아무런 운동도 특별히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친구들과 같이 야구공 놀이를 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선생님 한 분이 루 게릭이 공을 잘 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학교 야구팀에 넣었습니다.
갑작스런 학교 팀 영입에 루 게릭은 놀랐습니다. 그는 나중에 회고하기를 ‘운동장에 처음 섰을 때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자신을 주시하는데다, 환호하는 바람에 너무 무서워 집으로 가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겁 많은 루 게릭은 고등학교 팀에서 매우 유능한 선수로 떠올랐습니다.
아직 고등학교 시절, 프로 야구 연맹의 뉴욕 자이언츠 구단 임원이 루 게릭이 공을 치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팀 매니저 존 매그로우한테 데리고 가서 경기를 해보도록 했습니다. 매니저는 루 게릭이 큰 재목이기는 하나 메이저리그에서 뛰기에는 아직은 경험이 부족하니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 있는 마이너리그에 들어가서 운동을 하도록 해주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 여름 하트퍼드에서 경기하면서 루 게릭은 많은 돈은 아니지만 번 돈을 부모님께 드렸습니다.
루 게릭은 또 마이너리그에서 번 돈을 저축해 뉴욕에 있는 명문 컬럼비아 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컬럼비아에서는 야구 장학금을 주어 학교 대표 팀으로 뛰도록 했습니다. 루 게릭은 공을 하도 강하게 쳐서 경기장 밖의 행인들이 공에 맞을까 봐 걱정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때 뉴욕 양키스 야구팀이 루 게릭을 주목했습니다. 양키스는 1923년 시즌에 3천500달러를 주겠다며 그를 스카우트했습니다. 당시로써는 큰 돈이었습니다. 뉴욕 양키스는 홈런왕 베이브 루스와 더불어 루 게릭으로 팀의 타력을 강화했습니다. 루 게릭은 1925년 6월 초 정규 시즌 첫 경기에 1루수로 나섰습니다.
루 게릭의 기량은 날로 늘어났습니다. 상대 팀 투수들에게 뉴욕 양키스의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은 악몽이었습니다. 1927년에 루스는 무려 홈런을 60개나 쳤고, 안타를 47개나 쳤습니다. 루 게릭은 그 해 아메리칸 리그의 MVP, 즉 가장 뛰어난 선수상을 받았습니다. 그 해 뉴욕 양키스는 월드 시리즈 챔피언을 차지했습니다.
루 게릭은 경기 중에 다치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그러나 금방 회복했습니다. 루 게릭은 저녁마다 10시간씩 자고 물을 많이 마시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고 말했습니다.
1933년 루 게릭은 시카고 여성 엘리노어 트윗처와 결혼했습니다. 엘리노어는 루 게릭이 최고의 선수로 뛸 수 있도록 정성을 다했고 앓아누웠을 때는 옆에서 늘 그를 보살폈습니다.
뉴욕 양키스에서 활동한 지 13년이 되던 해인 1938년 5월 31일에는 2천 회 출전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수립했습니다. 이 숫자는 그 이전 기록자보다도 갑절이나 많은 횟수였습니다. 루 게릭은 그 해 시즌 타율이 거의 3할대를 기록했습니다. 득점도 115점이나 됐습니다. 그야말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 게릭이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뛰고 달리는 모습이 마치 노인처럼 보였습니다. 공을 던지고 잡는데도 어려워했습니다. 루 게릭은 그런 현상이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다음 시즌이 열렸을 때 그는 세 번 출전해 타점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1939년 5월 그는 결국 매니저에게 더 이상 뛸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해 6월 19일 루 게릭은 36회 생일을 맞았습니다. 그날 의사는 루 게릭에게 근육 기능이 퇴화되는 치명적인 희귀병을 갖고 있다는 청천병력 같은 선고를 했습니다. 근 위축성 측색경화증, 영어 약칭 ALS라고 하는 이 희귀병은 신체의 모든 근육이 작동할 수 없게 돼 결국은 죽음으로 가는 병입니다.
오늘날은 루 게릭의 이름을 따서 ALS를 보통 루 게릭 병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루 게릭은 죽어가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렵거나 슬퍼하는 표정도 짓지 않았습니다.
1939년 7월 4일, 양키 스타디움에는 미국의 위대한 야구 선수의 고별사를 듣기 위해 7천 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전 스타디움에 메아리쳤습니다.
[녹취: 루 게릭] "I consider myself the luckiest man on the face of the Earth. I might have been given a bad break, but I've got an awful lot to live for. Thank you."
“저는 스스로를 지구상에서 가장 행운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건강이 나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 아직도 살아서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루 게릭은 투병을 계속했으나 갈수록 약해져 1941년 6월 2일 불과 37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가족, 친구, 야구선수 등 그를 가까이했던 사람들은 물론 수많은 미국인들은 한 위대한 야구 영웅의 상실을 슬퍼했습니다.
미국인들은 아직도 살아 있는 순간들을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의연한 자세로 죽음을 맞이한 루 게릭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