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미용 제품을 만들어 대기업을 일궈낸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재벌, 마담 C.J. 워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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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C.J. 워커는 아프리카계 여성들의 머리 손질과 미용 제품을 만들어 대기업을 일으킨 최초의 미국 흑인 여성입니다.
1900년대 초 미국에 사는 흑인들의 삶은 극도로 어려웠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가정의 하인이나 농장, 빨래터의 노동자 등으로 일했습니다. 마담 C.J. 워커도 20년 동안 옷을 빠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흑인 여성들의 모발을 보호하고 가꾸는 제품을 개발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마담 C.J. 워커는 돈벌이에 성공한 점뿐 아니라, 흑인 여성들도 머리를 아름답게 가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한 데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비교적 짧은 일생을 살다 간 마담 C.J. 워커는 대부분 세월을 무척 어렵게 보냈습니다. 마담 C.J. 워커는 1867년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이름은 새라 브리들러브였습니다. 새라의 부모들은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가족은 미시시피 강 유역의 목화밭에서 일하며 살았습니다.
새라도 5살이 되자 가족들과 함께 목화 따는 일을 했습니다. 새라는 백인들을 위해 빨래를 하는 어머니와 언니도 도와줘야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새라가 7살 때 부모들이 황열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새라와 언니는 미시시피 주 빅스버그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새라는 불과 14살때 모세스 맥윌리암스라는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들은 결혼 3년 만에 딸을 낳았습니다. 딸에게는 릴리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또 2년 뒤 불의의 사고로 남편 맥윌리암스가 죽고 말았습니다. 연속되는 비극을 당한 새라는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 가면 빨래꾼 임금이 더 낫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옷을 빨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밤에는 학교에 가서 어렸을 때 못한 공부를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새라의 모발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머리카락은 건조하고 잘 부러지는데다 이곳저곳에서 빠지기도 했습니다. 새라는 이런저런 제품을 써봤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새라는 만약 내 머리를 건강하게 하는 제품을 개발하면 돈도 벌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37세 되던 해 새라는 옷을 빠는 데서 아이디어를 얻어 바셀린과 설파 등을 합성해 모발과 두피를 보호하는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독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향료도 섞었습니다. 그 약물을 써 보니 놀랍게도 자신의 머리털이 새로 나고 곱슬머리도 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새라가 자신만의 비법을 가미해 새로운 제품을 만들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라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제품을 개발했다고 말했습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자신이 썼던 제품을 만든 회사들과 경쟁을 하기 원치 않았던 새라는 서부 지방인 콜로라도 주 덴버로 이사를 갔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미시시피 강 주변을 벗어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덴버에서는 우선 남의 집 부엌 일을 했습니다. 낮에는 빨래를 하고 요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밤에 모발 제품을 계속 연구했습니다. 새라는 자신과 친구들의 머리에 제품을 시험했습니다. 효과는 아주 좋았습니다. 새라는 적은 돈이지만 몽땅 털어 작업장을 만들고 개발한 약물을 병에 넣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새라는 1906년 신문기자 출신인 찰스 조셉 워커와 재혼을 했습니다. 찰스는 새라의 친구이자 조언자이기도 했습니다. 결혼하면서 새라는 이름도 마담 C.J. 워커로 바뀌었습니다. 마담 워커는 자신의 제품을 판매할 여성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또 전국적으로 미용문화 학원이라는 것을 열어 제품 판매 훈련을 시키고 이들로 판매망을 구성했습니다. 훈련을 받은 여성들은 워커 에이전트로 불렸습니다. 이들은 전국 어디서나 흑인 사회에서 아주 인기 있는 사람들이 됐습니다. 마담 워커는 전국을 돌며 제품 판매에 노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메이카, 파나마, 쿠바 등 카리브해 국가들도 방문했습니다. 마담 워커의 제품은 대부분 주민이 흑인인 그런 곳에서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마담 워커의 사업은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에이전트가 3천 명이나 될 정도로 급속히 커졌습니다. 학원에 갈 수 없는 흑인 여성들은 통신교육으로 워커의 제품 사용법을 배웠습니다. 머지않아 수십만 명이 마담 워커 제품의 사용법을 배우고 사용하게 됐습니다. 수많은 흑인 여성들이 마담 워커 제품을 판매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을 살 수 있었습니다. 마담 워커는 많은 유색인종 여성들이 빨래터를 떠나 즐겁고 돈을 버는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마담 워커는 사업이 번창하자 1908년 사업 본부를 동부인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로 옮겼습니다. 피츠버그는 워싱턴 DC, 뉴욕, 볼티모어 등 흑인들이 많이 사는 대서양 쪽 도시에 가까워서 사업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곱슬머리를 곧게 펴는 것은 백인처럼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기독교 성직자들은 곱슬머리란 본래 하느님이 흑인에게 준 것인데, 사람이 그것을 바꾸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담 워커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목적이 여성의 모발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마담 워커는 큰 재산가가 됐고 전국에 유명해졌습니다. 마담 워커는 즐거운 새 삶을 살게 됐습니다. 그러면서도 마담 워커는 자신의 재산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습니다. 당시로써는 개인이나 단체를 돕는데 큰 돈을 기부할 수 있는 흑인 여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마담 워커는 흑인의 권익향상을 위해 싸우는 전국 유색인종 발전협회와 교회, 문화 단체 등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흑인 예술가들과 작가들도 지원했습니다. 흑인들을 상대로 한 폭력을 막는 데도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마담 C.J. 워커는 대통령도 만났습니다. 1917년에 흑인 여성단체 회원들과 함께 워싱턴으로 가서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을 찾아가 폭도들의 공격을 금하는 연방법을 제정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마담 C.J. 워커는 “나는 인생의 목적을 단순히 나를 위해 또는 나만 쓰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를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두고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담 워커는 1918년 뉴욕시에 크고 아름다운 집을 마련해 정착했습니다. 마담 워커는 여전히 열심히 일을 계속했지만 점차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는 쉬라고 권했지만 마담 워커는 듣지 않았습니다. 마담 워커는 51세때인 1919년 신장기능 장애로 갑자기 숨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마담 C.J. 워커의 사업 규모는 에이전트 2만여 명, 판매고는 오늘날로 치면 연간 수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마담 C.J. 워커는 요즈음 가치로 600 내지 700만 달러에 달하는 저택에 살 정도로 부를 누렸지만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돈을 어떻게 쓰는 것이 보람 있는 것인지를 보여준 여성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