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동양 문화에 정통한 노벨 문학 수상자, ​펄 벅​

펄 벅 여사의 동상.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중국 이야기 ‘대지’로 노벨 문학상 받은 ​펄 벅​ 여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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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동양 문화에 정통한 미국인 노벨 문학 수상자, ​펄 벅​ 여사

동양 문화에 정통한 미국 작가 펄 벅 여사는 노벨 문학상 수상작 대지를 비롯해 많은 단편소설, 시, 희곡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펄 벅은 1892년 웨스트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압살롬 사이든스티커와 캐롤라인 사이든스티커로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분들이었습니다. 부모들이 잠깐 미국에 들렀던 해에 태어난 펄 벅은 생후 3개월 때 다시 중국으로 가게 됐습니다.

펄 벅은 이후 거의 40년 동안을 중국인들과 함께 섞여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국의 사고방식, 문화를 배우게 됐고 영어와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펄의 어머니는 미국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을 집에서 직접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중국인 가정 교사를 들여서 그 외 과목들을 가르쳤습니다. 중국어 읽기와 쓰기는 물론, 공자의 가르침, 중국과 아시아 역사 등도 배웠습니다.

펄은 1910년 미국으로 돌아와 버지니아의 린치버그에 있는 랜돌프메이콘 여자대학 (Randolph-Macon Woman's College)에서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대학을 마친 펄은 다시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3년 후 존 로싱 벅(John Lossing Buck)과 결혼했습니다. 이때부터 이름은 펄 벅으로 바뀌었습니다.

남편 존은 농업 전문가이자 선교사였습니다. 이들은 결혼 후 중국 북부의 한 가난한 시골 마을로 가서 살았습니다. 그곳 중국인들의 삶은 나중에 펄 벅의 여러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됐습니다.

펄 벅은 1920년에 첫 딸 캐럴을 낳았습니다. 불행히도 캐럴은 지적 장애를 갖고 있었습니다. 펄은 특수교육을 위해 캐럴을 미국 뉴저지로 보내야 했습니다. 펄 벅은 어린아이를 멀리 떠나 보내야 하는 아픔 외에 딸의 특수 교육비를 대기 위해 많은 돈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펄 벅은 책을 쓰기로 하고 첫 작품 동풍 서풍 (East Wind, West Wind)을 내놓았습니다. 이 소설은 서양에 대해 배워가는 한 중국 여인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펄 벅이 쓴 소설 '대지'

​펄 벅을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만든 건 그 다음 작품 대지였습니다. 펄 벅은 아는 거라곤 중국밖에 없어 소설 대지(The Good Earth) 를 썼다고 말했습니다. 대지는 1931년과 32년 미국 최고의 판매고를 기록했습니다. 펄 벅은 이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비롯한 여러 상을 받았습니다. 1937년에는 대지가 영화로 만들어져 여러 분야의 오스카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다음 해에는 노벨 문학상까지 받게 됐습니다.

대지는 왕룽이라는 한 가난한 중국인과 그의 부인 오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열심히 일해서 땅을 사게 됩니다. 그리고 농사를 지어 먹고 살 수 있게 되고 남은 곡식은 팔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오랜 가뭄으로 땅은 메마르고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습니다. 왕룽도 모든 것을 팔아야 했고 가족은 거리에서 구걸해야 했습니다. 그같은 난관을 극복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이런 이야기는 대공황으로 시달리고 있던 당시 미국인들에게는 흥미와 함께 우리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위로를 주었습니다.

1932년 펄 벅은 대지의 주인공 왕룽이 죽은 뒤 아들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아들들(Sons)’을 펴냈습니다. 3년 후에는 중국 혁명기에 살았던 손자 왕유안의 이야기 ‘분열된 집 (A House Divided)’을 펴냈습니다. 이 소설은 중국인들이 어떻게 옛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추구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대에 걸친 소설을 다 합쳐 대지라고 부릅니다.

당시 대부분 미국인은 중국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영화에서나 보던 것이 전부였습니다. 중국인들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는 대지를 읽고 미국인들은 중국인들이 영화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깨닫게 됐습니다.

40년 가까이 중국에서 산 펄 벅은 미국으로 돌아와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했습니다. 자신의 소설을 많이 출판해준 R. J. 월쉬와 재혼한 펄 벅은 펜실베이니아 동부 그린힐스 농장에서 살면서 신문과 잡지에 글을 썼습니다. 펄 벅은 전쟁, 정치, 종교, 인간평등 등 여러 가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발표했습니다.
펄벅은 미국에서 많은 강연도 다녔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세계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2차 대전으로 혼혈아와 고아들이 많던 1941년, 펄 벅은 사회복지 재단을 설립하고 세계 각지의 어려운 아이들을 도왔습니다. 펄 벅은 사람들에게 피부색이나 문화적 배경을 따지지 말고 집 없는 아이들을 입양하라고 권장했습니다. 펄 벅 자신도 두 명의 혼혈아들을 포함해 7명의 아이를 입양했습니다.

한국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펄 벅은 19세기 말부터 해방 때까지 격동기에 살아간 한 양반 가족 4대의 이야기 ‘살아있는 갈대(The Living Reed)’를 발표했습니다. 1964년에는 한국에서도 펄벅재단이 설립돼 많은 한국 아이들이 미국에 입양되기도 했습니다.

펄 벅은 80세 되던 1973년 타계해 그린힐스 집 근처에 안장됐습니다. 세계 각지의 문화를 보호하고 편견을 없애려는 작가의 정신은 국제펄벅재단에 의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