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미국 최초의 여의사 엘리자베스 블랙웰

미국 최초의 여의사 엘리자베스 블랙웰.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미국 최초의 여의사 엘리자베스 블랙웰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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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미국 최초의 여의사 엘리자베스 블랙웰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국 최초의 여의사가 된 개척자적 여성입니다. 1800년대에는 미국에서도 여성의 사회진출이 막혀 있는 분야가 많았고 의료분야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1821년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사무엘 블랙웰과 어머니 하나 블랙웰의 7남매 중 셋째 딸이었습니다. 아버지 사무엘은 잘 나가는 설탕 회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832년에 설탕공장에 불이 나 사업이 망하자 사무엘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이들은 뉴욕을 거쳐 오하이오주에 정착했으나 사무엘은 오하이오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났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두 언니와 함께 돈을 벌기 위해 집에서 여자들만을 가르치는 학교를 시작했습니다. 두 남동생들은 밖으로 나가 일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암을 앓고 있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친구를 도와주면서 여성 환자는 여성이 더 잘 보살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려면 여성도 의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친구도 만약 여성이 자기를 치료했더라면 고통을 좀 더 잘 이해했을 거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에게 의학을 공부하라고 당부하면서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당시에는 여자가 의대에 들어갈 수도 없었지만 학비도 비쌌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남부인 노스캐롤라이나주로 옮겨 교사로 일을 하면서 의과대학 학비를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에 몇몇 의대에 원서를 냈습니다. 예상대로 어떤 의대도 엘리자베스의 지원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대학 관계자들은 꼭 의사가 되고 싶으면 남장을 하고 프랑스 파리로 가보라는 제안까지 했습니다.

모두들 거부했는데, 단 한 군데 뉴욕주에 있는 '제네바 의과대학'이라는 곳에서 받아들이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즉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영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엘리자베스는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 의대에서도 여자를 받아들이기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를 추천한 교수의 체면을 생각해 학생들에게 여론조사를 해봤습니다. 학생들은 여자가 의대에 들어오려 한다는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해 장난삼아 들어오게 하자고 한 것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개의치 않고 입학을 진행했습니다. 막상 엘리자베스가 오자 학생들은 후회를 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입학 허가를 받았고, 수업료도 납부했기 때문에 그때 가서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입학은 됐지만 학교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교수들은 강의실에서 엘리자베스에게 따로 떨어져 앉으라고 명령하는가 하면 실험실 사용을 못 하게 하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어떤 학생은 위협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학교 밖에서는 사람들이 남녀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나쁜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이런 어려움을 다 참고 드디어 1849년 의대를 졸업했습니다. 그것도 1등이었습니다. 미국은 물론 유럽까지 포함해도 의대 과정을 이수한 여성은 엘리자베스가 처음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학교를 졸업하고 산부인과와 소아과를 전문으로 하는 한 병원에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일은 거의 간호사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엘리자베스는 눈에 화학 약물이 튀는 사고를 당해 한쪽 눈의 시각을 잃고 말았습니다. 의사의 꿈을 접어야 할지 불안도 하고 실망도 컸지만 엘리자베스는 좌절하지 않고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세인트 바톨로뮤 병원에서 수련을 계속했습니다. 1851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엘리자베스는 뉴욕시에서 진료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보는 여의사에 생소해 환자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다시 극빈 지역에다 진료소를 열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에게는 두 가지 꿈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병원을 세우는 일, 또 하나는 여성들을 위한 의과대학 설립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이런 꿈은 여동생 에밀리가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에밀리도 미국에서 세 번째로 의대를 졸업한 여성이었으며, 역시 오랜 세월 어려움을 겪은 끝에 의사가 됐습니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블랙웰 자매는 헌 집을 수리해 병원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첫해는 역시 환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일 년 내내 약 300명의 환자를 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렇지만 두 자매의 환자 진료는 뉴욕에서 점차 인정을 받기 시작해 둘째 해에는 무려 첫해의 열 배가 넘는 3천여 명의 환자들이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들 자매는 가난한 지역에서 진료를 하다 보니까, 미리 막을 수 있는 병으로 고생을 하는 환자들을 많이 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예방 의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환자의 집을 방문하는 계획을 시작했습니다. 환자의 집에 찾아가서 집을 청결하게 하는 방법, 음식을 관리하는 방법 등을 가르쳐 줌으로써 질병을 미리 예방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예방할 수 있는 병으로 고통을 받고 죽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는 엘리자베스 블랙웰의 예방의학 이론은 뉴스를 타고 확산됐습니다. 그 이론은 차츰 의학계에서 중요성이 인정됐고 지금은 보건 의학 분야의 중요한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이1868년 뉴욕시에 설립한 여성 의과대학의 공지문.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미국 최초의 간호학교를 세운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868년에는 뉴욕시에 여성 의과대학도 설립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여학생들에게 예방 의학을 가르쳤습니다. 의과대학에서 정규 과목으로 예방 의학 강좌가 생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이런 추세에 힘입어 그 후에 보스턴과 필라델피아에서도 여자 의대들이 등장했습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영국 시민권도 갖고 있으면서 그곳 여성 의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미국에서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한 엘리자베스는 의대의 운영을 동생 에밀리한테 맡기고 영국 런던으로 건너 갔습니다. 거기서도 여자 의과대학을 설립했습니다. 영국에 있는 동안 의학 서적도 내고, 많은 강연을 다니면서 특히 예방 의학에 대한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의사들에게는 진정한 책임이 고통을 예방하는 것,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인한 고통을 막는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1871년에는 영국 국립보건학회도 설립해 영국의 보건증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엘리자베스와 동생 에밀리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의학계에서는 물론 어느 분야에서나 여성은 남자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여성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남자들은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그러나 두 남동생들은 결혼을 했습니다. 부인들은 여성 운동가로 소문난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1910년 89세로 영국에서 타계했습니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은 노년에 젊은 여성들로부터 많은 감사의 서신을 받았습니다. 많은 편지가 앞으로 여성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었다는 감사의 편지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