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천 번이 넘는 거부 끝에 치킨 제국을 일으킨 커넬 샌더스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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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닭튀김 식당 체인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 KFC는 오늘날 120여 나라에 약 3만개의 가맹점을 갖고 있습니다. 커넬 샌더스가 창업한 KFC는 세계적으로 4번째로 규모가 큰 fast food restaurant, 즉 속성으로 음식을 시켜먹을 수 있는 식당 연쇄망입니다. 2013년 매상액은 230억 달러, 금액으로는 햄버거 프랜차이스인 맥도날드에 이어 두번째가 됩니다. KFC의 창업자 커넬 샌더스는 60대에 들어서 창의적 사업을 시도했고 무려 1000여번이나 거절을 당한 끝에 성공을 거둔 불굴의 사업가였습니다.
커넬 샌더스의 본명은 할랜드 샌더스 (Harland Sanders)입니다. 이름에 붙은 군대의 대령이라는 의미의 커넬(Colonel)은, 그가 켄터키에서 여러가지 사업을 하며 지역 경제에 기여를 한 공로로 주 지사가 하사한 존칭이었습니다. 커넬 샌더스는 1890년 중부지방인 인디애나에서 태어났습니다. KFC가 태동한 켄터키와 가까운 곳입니다. 나중에 사업에 성공하기 전 까지 샌더스의 삶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6살 때 농장을 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린 샌더스는 어머니를 도와 농장 일도 하고 집안 일도 해야 했습니다. 학교는 7학년 까지 다니다 그만두었습니다. 그후 어머니가 재혼을 했는데, 의붓 아버지의 가정 폭력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4살이 되자 샌더스는 집을 나가 전국을 떠돌며 보일러 점검원, 보험 판매원 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습니다. 심지어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6살 어린 나이로 군대에 입대하기도 했습니다. 군에서 제대를 한 후에는 철도 노동자, 보험 판매원 등의 일을 했지만 모두 이런 저런 사건으로 해고가 됐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18살 때는 조세핀이라는 여성과 결혼 해 1남 2녀를 두었습니다.
1920년 샌더스는 오하이오 강을 오가는 정기연락선을 운행하는 첫 사업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강에 다리가 생기고 자동차가 등장하자 사업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연락선 사업을 팔고 램프를 만드는 공장을 해 봤지만 그것도 다른 회사와의 경쟁에서 져 망하고 말았습니다. 샌더스는 이후 60대 중반까지 주유소, 모텔, 식당 등 여러가지 사업체를 운영했습니다. 한때는 잘 나가기도 했지만, 화재가 나기도 하고, 2차 대전이 벌어지기도 하고, 고속도로가 나면서 손님이 떨어지기도 하는 등 하는 사업마다 실패를 했습니다.
샌더스는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는 도중 새로운 닭고기 조리법을 개발했습니다. 드디어 50세가 되던 해 '남부식 닭고기 튀김'이라는 새로운 음식의 조리법을 확정했습니다. 11가지의 양념과 허브의 식재료가 들어가고, 조리 시간을 크게 단축하는 압력 방식이었습니다. 미국 남부의 특징을 살린 조리법이라는 걸 연상할 수 있도록 명칭은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으로 정했습니다. 샌더스는 자신이 개발한 조리법을 다른 식당에 전수하고, 그 대가로 이익의 일부를 받는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바로 프랜차이즈 사업 아이디어였습니다.
계약 조건은 식당 측이 샌더스의 비밀 요리법과 상품명을 사용하고, 팔리는 닭 한마리 당 5센트를 프랜차이스 권리금으로 샌더스에게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런 계약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거부 당한 숫자가 무려 1008번이나 됐습니다. 어느덧 62세가 된 1952년, 마침 내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대규모 식당을 갖고 있던 피트 하먼이라는 사업가가 샌더스의 조리법을 구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009번째만에 구매 결정이 난 이곳은 켄터키 후라이 치킨 프랜차이스 1호점이 됐습니다. 피트 하먼은 다른 식당과의 차별화를 위해 켄터키에서 온 제품이라는 이색적인 느낌, 남부의 친절이라는 이미지가 있는 샌더스 조리법을 샀습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피트 하먼의 KFC 식당은 사람들로 붐볐고 그 치킨이 인기가 있는걸 본 다른 사장들도 다투어 커넬 샌더스의 조리법을 구매했습니다.
샌더스는 자신의 조리법을 파는 노력을 하면서도 식당을 계속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식당 옆으로 새로운 고속도로가 나면서 손님이 끊어졌습니다. 결국 1955년에 경매 처분을 하고 빈 털털이가 됐습니다. 그의 나이는 이제 노년에 접어든 65세였습니다. 그래도 샌더스는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본격적인 프랜차이스 사업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샌더스는 자동차 안에서 잠을 자면서 전국 각지의 식당을 돌며 사업을 홍보했습니다. 1년에 달린 거리가 20만 마일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샌더스가 가맹점을 확대하는 동안 재혼한 아내 클라우디아는 KFC만의 비밀 양념을 만들어 각 식당에 배송했습니다.
KFC 가맹점은 불과 2년 사이 600여개로 불어났습니다. 77세때인 1967년에는 가맹점 수가 전국에 3500개가 넘었습니다. KFC는 캐나다, 영국, 멕시코, 중국, 한국 등 세계로 번져 나갔습니다. 그 무렵 샌더스는 미국 내 대부분의 경영권을 다른 사람에게 매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월급을 받는 홍보대사로 일을 했습니다. 샌더스는 새로 문을 연 매장을 방문해 운영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고 TV 광고에도 직접 출연했습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노력한 덕에 그가 타계한 1980년에 KFC는 전 세계 48개국에 약 6000여 개의 매장을 가진 대규모 프랜차이즈로 성장했습니다.
커넬 샌더스는 자선사업도 많이 했습니다. 샌더스는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다 힛치 하이크를 하는 젊은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자신이 어려웠을 때를 생각해서 길에서 차를 태워달라는 사람을 만나면 거절을 하지 않았던 샌더스는 운전수에게 차를 세우라 하고 그 젊은이를 태웠습니다. 그 젊은이는 대학생이었는데, 일을 끝내고 기숙사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바지와 구두는 흙과 옥수수 부스러기로 지저분했습니다. 샌더스는 그 학생을 기숙사 대신 대학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 학비를 전액 내주었습니다. 이 처럼 샌더스는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데 적극적이었습니다.
늦게까지 갖고 있던 캐나다 사업에서 나오는 이익금 전액을 교회, 병원, 보이스카웃, 구세군 등을 위한 자선사업에 투입한 것도 유명한 얘기입니다. 샌더스는 또 외국 고아를 70여명이나 입양해 보살피기도 했습니다. 그의 뜻을 살려 설립된 KFC 기금은 세계 식량기구를 통해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한 막대한 자금을 희사하고 있습니다.
샌더스는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There's no reason to be the richest man in the cemetery. You can't do any business from there." 묘지에서는 최고 부자가 돼야할 이유가 없다, 거기에서는 사업을 할 수 없다.” 라는 말입니다.
늘 흰 정장을 하고 있는 커넬 샌더스의 모습은 KFC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KFC 치킨의 조리법을 팔러 다니던 어려운 시절, 그는 옷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벌 뿐인 여름용 흰색 양복만 입고 다녔습니다. 뜻하지 않게 그 양복은 오히려 거래자들에게 긍적적인 인상을 주었고, 샌더스의 트레이드 마크로 굳어졌습니다.
90세가 된 1980년 커넬 샌더스는 연간 2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을 남기고 켄터키 루이빌에서 타계했습니다. 그는 어려웠던 시절을 상징하는 하얀 양복을 입고 무덤에 묻혔습니다. 거듭된 난관에도 좌절할 줄 랐던 커넬 샌더스, 그는 프랜차이스 사업에 또 하나의 큰 발자취를 남기고 간 전설적인 기업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