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살사의 여왕 셀리아 크루즈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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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리아 크루즈는 20세기 최고의 ‘살사’ 가수로 평가되고 있는 쿠바 출신 연예인입니다. 셀리아 크루즈는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부터 쿠바와 아프리카의 리듬이 혼합된 ‘송(Son)’ 전반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열정적인 가수로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셀리아는 미국에 온 후 자신이 낸 70개 이상의 음반과 수많은 공연을 통해 무엇보다 살사로 라틴 아메리카 음악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여성이었습니다.
셀리아 크루즈는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1925년 태어났습니다. 부모가 음악인은 아니었지만, 셀리아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나타냈습니다. 셀리아의 할머니는 손녀딸이 말을 하기도 전에 노래했다고 회상할 정도였습니다.
셀리아는 학교나 마을에서 행사가 있을 때면 늘 노래를 불렀고 십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수많은 경연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철도 노동자였던 셀리아의 아버지는 딸이 교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당시에는 가수가 그리 존경 받는 직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셀리아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바나에 있는 ‘노말교육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결국 가수가 된 셀리아 크루즈지만 자신은 아버지의 희망대로 교사가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계에 쿠바의 음악을 가르쳤고 인생을 최대한 행복하게 사는 길을 가르친 교사였다는 것입니다.
셀리아 크루즈가 쿠바에 있던 1930년대와 40년대 쿠바, 특히 아바나에는 ‘손’이라는 음악이 크게 유행했습니다. 드럼과 노래가 어우러지는 것으로 주로 춤을 위한 곡들입니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늘 유명한 가수나 음악 그룹의 룸바, 맘보, 구아라차 같은 댄스곡을 들려주었습니다. 가수에 대한 꿈을 버릴 수 없었던 셀리아 크루즈는 1947년에 쿠바국립음악학교(National Conservatory of Music)에 들어가 음악 이론과 발성, 피아노 등을 배웠습니다.
음악학교에 간 지 두어 해 뒤 쿠바의 유명한 악단 ‘라소노라 마탄세라(La Sonora Matancera)’가 새로운 가수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악단의 리드싱어로 활동했던 가수가 그룹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셀리아 크루즈에 주목했던 악단은 그의 노래를 직접 들어보고 즉석에서 영입했습니다. 쿠바인들은 머지않아 셀리아 크루즈의 강렬한 목소리에 완전히 빠져들게 됐습니다.
1959년, 쿠바에는 공산혁명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가 나라를 장악하는 대변화가 일었습니다. 이때 많은 쿠바인은 미국으로 탈출했습니다. 셀리아 크루즈는 1960년에 멕시코 공연을 갔다가 쿠바로 가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카스트로는 미국 시민이 된 셀리아 크루즈에게 다시는 쿠바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962년에 어머니가 사망했지만 셀리아는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셀리아 크루즈는 미국에서 악단의 트럼펫 연주자 페드로 나이트와 결혼했습니다. 셀리아 크루즈는 여러 가지 라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뉴욕시에서 살았습니다. 뉴욕의 여러 음악가는 각기 다른 전통과 리듬, 스타일을 가진 음악을 혼합한 새로운 것들을 실험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로 등장한 것이 쿠바의 음악 ‘송’을 다른 라틴 음악과 혼합한 ‘살사’였습니다.
미국에서 태동한 것이어서 이 속에는 미국 내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삶의 고통과 행복이 들어 있습니다. 인기가 높던 셀리아 크루즈는 이때부터 살사 가수로 각인됐습니다. 셀리아 크루즈는 여러 유명 음악가들과 공연을 하고 음반도 여럿 내놓았습니다.
셀리아 크루즈는 늘 번쩍번쩍 빛나는 높은 구두를 신고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늘 밝은 색으로 짙게 화장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목소리만큼이나 정열적인 춤을 추었습니다. 셀리아 크루즈는 노래를 부르면서 악단과 청중의 흥을 돋우기 위해 설탕이라는 의미의 스페인어 "아수카르(Azúcar!)" 를 외치곤 했습니다.
셀리아 크루즈는 여러 편의 영화에도 출연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영화는 1992년에 나온 ‘맘보의 왕들(The Mambo Kings)’입니다. 여기서 셀리아 크루즈는 살사 가수로 등장합니다. 이 영화에서 부른 노래 ‘관타나메라(Guantanamera)’는 영화보다 더 널리 사랑을 받았습니다.
셀리아 크루즈는 즐거움과 성공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고 남성들이 주도하던 살사 음악 장르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정상의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1990년에는 ‘최고 트로피칼 라틴 음악공연(Best Tropical Latin Music Performance)’부문에서 그래미상을 받았습니다. 1994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셀리아에게 국민예술훈장을 수여했습니다.
1994년에는 빌보드 라틴음악 명예의 전당에, 1999년에는 국제 라틴음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2011년 3월 미국 우정국은 라틴 음악 거성 5명의 기념 우표를 발행하면서 셀리아 크루즈를 포함했습니다.
셀리아 크루즈는 다른 사람을 돕는 데도 적극적이었습니다. 2002년에는 남편과 함께 ‘셀리아크루즈기금’을 설립하고 음악을 공부하는 가난한 학생들과 암 환자들에게 재정지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셀리아 크루즈는 2003년 만 77살 나이에 뇌암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타계하자 음악인, 배우, 정치인, 일반 팬 등 무려 20만 명이 살사의 여왕에게 작별을 고했습니다. 셀리아 크루즈는 마지막 음반에 실린 ‘Rie y Llora’에서 인생의 즐거움과 고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셀리아는 ‘웃고 울고’란 제목의 이 노래에서 사람들에게 삶의 순간순간을 즐거움으로 가득 차게 살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