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전 재산을 자선사업에 넘긴 면세점 재벌, 찰스 피니

찰스피니. 사진 제공=The Atlantic Philanthropies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전 재산을 자선사업에 넘긴 면세점 재벌, 찰스 피니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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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전 재산을 자선사업에 넘긴 면세점 재벌, 찰스 피니

세계 최대의 면세점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찰스 피니는 모든 재산을 자선사업에 기부하고 이제는 평범한 월세 아파트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전 재산을 사회에 돌려준다는 약속을 한 찰스 피니는 최근까지 자기 재산의 99%를 사회에 환원해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피니가 자선사업에 기증한 자산은 총 80억 달러가 넘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부호인 빌 게이츠의 자선기금은 약 300억 달러, 찰스 피니보다는 훨씬 많지만, 재산 대비 기부 비율은 약 37% 수준으로 피니의 99%에는 크게 못 미치고 있습니다. 피니는 누구든지 자기가 번 돈은 자기 맘대로 쓸 수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도 찰스 피니로부터 자극을 받아 자선사업에 적극 나서게 됐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찰스 피니는 미국은 물론 세계 여러 곳의 다양한 분야에 지원을 했지만 그 중에서도 교육과 연구 분야가 가장 많았습니다. 모교인 코넬 대학이 최대 수혜자로 10억 달러가 넘는 기부금을 받았습니다. ​

찰스 피니의 본명은 찰스 프란시스 피니(Charles Francis Feeney), 사람들은 흔히 척 피니(Chuck Feeney)라고 부릅니다. 그는 1931년 4월 23일 미국 동부 뉴저지주에서 태어났습니다. 피니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공군에 입대해 무전병으로 복무했습니다. 제대 후에는 명문인 뉴욕 코넬대학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하고, 좀 더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습니다. 그가 면세점 사업을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습니다.

그 무렵 프랑스의 지중해 연안에는 미국 군함이 많이 정박해 있었고 미군 약 3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미군에게는 세금을 안내고 술을 살 수 있는 혜택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피니는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라는 결론을 내리고 필요한 절차를 밟아 주류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피니는 술 한 병을 5달러에 사서 거의 15달러에 팔 수 있었습니다. 갈수록 품목이 늘어나 향수에 자동차까지 팔았습니다. 매상은 계속 늘고 엄청난 현금이 쌓였습니다. 1960년에는 친구와 함께 면세 쇼핑 그룹(Duty-Free Shoppers Group -DFS)이라는 회사를 공식 출범했습니다. 그러나 DFS의 첫 사업은 회계 관리 문제로 망하고 말았습니다.

피니는 실망하지 않고 계속 다른 사업기회를 노렸습니다. 그가 추진한 사업은 이제 군부대가 아니라 공항 면세점이었습니다. 드디어 피니는 1964년 하와이의 호놀룰루 공항 면세점 입찰을 따냈습니다. 12만5천 달라에 5년 동안 사업을 하는 조건이었습니다. 피니에게는 사업가로서의 뛰어난 감각이 있었지만, 운도 따랐습니다.

일본은 1964년 올림픽을 앞두고 폐쇄적인 나라라는 국가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해외여행 자유화를 단행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수많은 일본인이 호놀룰루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일본인들에게는 호놀룰루의 면세점이 최고의 인기였습니다. 그때 일본에서는 위스키 한 병을 사려면 35달러를 주어야 했는데, 이곳 면세점에서는 불과 7달러면 샀습니다. 양담배는 10분의 1 가격이었습니다. 피니의 면세점은 1년 매상이 무려 1천만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항공업계의 변화도 사업에 크게 도움이 됐습니다. 바로 대형 여객기인 보잉 747기의 등장입니다. 거대한 여객기가 하늘을 날기 시작하면서 세계 곳곳에 항공 여행객이 폭발처럼 늘어났습니다. 피니의 DFS 매장도 여러 곳으로 확산하면서 날로 번창했습니다.

마카오에 위치한 면세 쇼핑 그룹(DFS )의 면세점.

1년에 1천만 달러 매상도 많다고 했는데, 이제는 하루 100만 달러, 1년이면 3억6천500만 달러의 매상을 올렸습니다. 피니의 공항 면세점은 국제적인 사업이 됐고 이 분야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게 됐습니다. 1970년대 말 세계 각 매점의 직원 수는 5천 명을 넘었고, 매상은 연 30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피니는 비행기 출장을 갈 때는 일반석을 타고, 서류 등은 비닐봉지에 넣어 다니고, 점심도 동네 간이 식당의 햄버거 샌드위치로 때웠습니다. 남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비난도 많이 받았습니다. 미국의 한 경제지는 "돈만 아는 억만장자" 1위에 피니를 꼽기도 했습니다.

부자가 된 피니는 모든 것이 행복했습니다.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부자란 또 다른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즉 극도의 공허감이었습니다. 피니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여하지 않는다면 억만장자가 의미가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피니는 1982년에 자선사업을 위한 ‘아틀랜틱재단(The Atlantic Philathropies)’을 설립하고 DFS의 자기 지분 약 39%를 모두 재단에 투입했습니다. 액수로는 약 5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피니는 그런 활동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습니다. 피니의 기부는 남캘리포니아대학(USC)의 세계 최대 의료연구시설, 아일랜드의 생명공학 센터, 베트남의 의료시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에이즈(AIDS) 퇴치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기부 건수는 무려 2천900여 건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숨은 노력은 결국 만천하에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97년 운영하던 면세점을 매각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회계장부가 공개되면서 자선 활동이 외부에 알려진 것입니다.

그 후로도 꾸준히 기부를 계속해온 피니는 2017년, 모교인 코넬대학에 700만 달러를 마지막으로 살아 있는 동안 전 재산을 기부한다는 약속을 완전히 이행했습니다. 그의 친구이자 변호사인 하비 데일(Harvey Dale)은 “척은 자동차도 없고, 집도 없고, 구두는 한 켤레뿐, 그리고 15달러짜리 손목시계를 차고 다닌다”고 핀의 근황을 전했습니다.

그동안 즐겁게 사업을 해왔다는 찰스 피니. “100만 달러가 더 있다는 건 좀 더 안락할 수 있다는 말이지만, 난 지금 안락하다, 더 이상 100만 달러가 필요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