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생어는 대부분의 여성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데 삶의 대부분을 바쳤던 시기에 피임, 인공유산 등을 포함하는 ‘birth control’, 즉 임신 조절 운동을 전개한 여성이었습니다. 마거릿 생어는 사회의 인식, 각종 법규, 사법당국, 보수적인 교회 등 수 많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120여 년 전 피임과 출산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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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생어는 1883년 미국 동부 뉴욕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이 때 이름은 마거릿 히긴스. 나중에 결혼해서 남편의 성을 따라 마거릿 생어가 됐습니다.
마거릿이 임신 조절에 관심을 갖게 된 1차적인 동기는 어머니였습니다. 마거릿의 어머니는 여러 차례 임신했고 생존한 자녀가 마거릿 외에 열 명이나 됐습니다. 마거릿은 출산과 양육으로 지친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는 열여덟 번째 임신한 다음 48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삶에서 마거릿은 아무런 대책 없이 임신을 계속하는 것은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마거릿은 진로를 바꾸어 보건 간호사가 됐습니다.
마거릿이 살던 곳은 뉴욕시에서도 유럽에서 막 건너온 사람들이 몰려 있는 가난한 지역. 그곳 여성들 사이에서는 불법적이고 위험한 임신 중절이 흔히 벌어졌습니다. 그에 비하면 건축기사 남편과 세 아이를 둔 자신의 생활은 훨씬 안정돼 있었습니다. 마거릿은 건강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여성의 임신 조절은 필요하다고 믿게 됐습니다.
마거릿은 그러한 운동을 위해 우선 ‘반란여성 (The Woman Rebel)’이라는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1914년 3월에 나온 창간호에서 마거릿은 이 신문의 목적이 여성들에게 삶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선언했습니다.
또한 여성들이 혼전에도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권리, 파괴의 권리, 창조의 권리, 사람답게 사는 권리, 사랑하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이 신문은 노동문제, 결혼, 윤락업, 혁명 등 당시 논쟁거리는 물론 불법으로 규정된 사항들까지 다루었습니다. 이 신문은 머지않아 뉴욕은 물론 다른 지역에서까지 화제의 신문이 됐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1873년에 제정된 콤스톡법(The Comstock Act)이 있었습니다. 이 법은 ‘어떤 형태의 피임기구라도 풍속을 교란하고 외설적인 것이다’ 라고 규정하고, 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또, 그것을 우편을 통해서, 또는 각 주의 경계를 넘어 옮기는 것을 금지시켰고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거나 교육시키는 것도 위법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당국에서는 마거릿에게 신문이 콤스톡법에 저촉된다며 신문 발행을 중단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마거릿은 신문 대신 ‘가정의 한계(Family Limitation)’라는 제목의 책자를 발행했습니다. 그 안에는 각종 피임 방법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마거릿 생어는 1914년 8월 콤스톡법 위반혐의로 기소됐습니다. 만약 유죄로 판결이 날 경우 수십 년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는 중대한 혐의였습니다.
마거릿은 재판을 피하기 위해 유럽으로 가면서 친구들에게 책을 배포해 주도록 부탁했습니다. 책자는 전국으로 퍼졌고 임신 조절에 대한 전국적인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의 관심도 크게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약 1년이 지난 뒤 마거릿은 재판에 응하기로 마음을 먹고 귀국했습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이 내려질 위험이 있더라도 오히려 재판을 이용해 여성은 임신 문제에 있어 자유로워야 한다는 점을 만천하에 설파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생어가 재판을 준비하고 있을 때 5살짜리 딸 페기가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딸이 사망하자 마거릿은 애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숨지게 했다는 죄책감과 깊은 좌절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위로와 함께 임신 조절에 대한 지지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언론에서는 마거릿에 대한 많은 기사를 실었고, 정부는 마거릿에 대한 기소를 취하했습니다.
마거릿은 1916년 뉴욕 브라운스빌이라는 곳에 미국 최초로 피임 센터를 열었습니다. 정면으로 콤스톡 법을 위반한 것이었지만 개업 첫날 100명이나 되는 여성들이 센터를 찾아올 만큼 큰 인기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마거릿 생어는 체포돼 30일 동안 감옥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마거릿은 굴하지 않고 ‘임신조절 (Birth Control Review)’라는 새로운 간행물을 발행했습니다.
마거릿은 1923년 최초의 피임 센터를 열었습니다. 그 후 미국 내 여러 곳에 이와 비슷한 센터들이 연이어 개설됐습니다. 1942년에는 ‘미국가족계획연맹(American Birth Control League)’도 조직했습니다. 이 연맹은 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보건 조직이 됐습니다.
마거릿 생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국제무대로 활동 영역을 넓혀 국제가족계획연맹(IPPF)을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 연맹은 1952년 인도 뭄바이에서 회의를 열고 국제기구로 정식 출범했습니다. 역시 마거릿 생어가 초대 회장으로 추대됐습니다. 국제가족계획연맹은 180여 국가가 참여하는 세계 최대의 비정부 기구의 하나로 발전했습니다.
마거릿이 살아 있는 동안 미국에서는 콤스톡법이 폐지됐습니다. 또, 전에는 공개적으로 말도 못 꺼내던 피임 관련 제품들이 개발되고 홍보가 되고 판매가 되는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20세기 중 여성들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은 마거릿 생어는 1966년 미국 아리조나 주 투산에서 타계했습니다. 국제가족계획연맹은 그가 간 지 반세기가 넘은 지금도, 성·생식 보건 분야의 개선을 통한 보건과 복지향상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