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미국 자동차 산업의 귀재, 리 아이아코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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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언론은 이달 초 자동차 산업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경영의 귀재 리 아이아코카가 타계한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30여 년 동안 포드 자동차 사에 몸을 담았고, 크라이슬러 사로 옮겨서는 사상 가장 극적인 재기의 역사를 기록한 리 아이아코카가 7월 2일 캘리포니아에서 94세로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사망 원인은 파킨슨 합병증 때문으로 알려졌습니다.
아이아코카는 미국 3대 자동차 회사 중 두 군데, 즉 포드와 크라이슬러의 최고 경영자로 재직한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텔레비전 광고에 직접 출연해 미국에서 가장 얼굴이 잘 알려진 경영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서전으로 베스트셀러 반열에도 올랐습니다. 그런 인기로 아이아코카는 대통령 후보 물망에까지 올랐습니다.
리 아이아코카는 1924년 10월 15일 펜실베이니아주 알렌타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 가정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이름은 리도 안토니 아이아코카였습니다. 아버지는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핫도그 행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극장을 여러 개 갖고 자동차 임대회사도 운영하는 가진 꽤 여유 있는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임대회사에는 포드 자동차 몇 대가 있었는데, 어린 리도는 이때부터 자동차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아코카는 거리에서나 학교에서 이탈리아계라는 것 때문에 놀림도 자주 받았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열병에 걸려 좋아하던 운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공부에 집중해 1942년에는 우등으로 학교를 마쳤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질병 때문에 군 면제를 받은 아이아코카는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리하이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산업공학을 전공한 그는 뛰어난 토론가로 등장했고, 3년 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마쳤습니다.
졸업 후 아이아코카는 포드 자동차에 취업했습니다. 그러나 휴직계를 내고 프린스턴 대학에 진학해 기계공학 석사 학위를 받은 다음 다시 포드로 돌아왔습니다. 공학을 전공했지만 아이아코카는 마케팅에 더 관심이 많아 판매 부서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열심히 일한 덕에 그는 펜실베이니아 동부 지역 포드 딜러의 판매 전략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고객들에게 친밀감을 주기 위해 아이아코카는 이탈리아 이름 리도를 리(Lee)로 바꾸었습니다. 자기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 높았던 젊은이로서는 어려운 타협이었습니다. 화술에 뛰어난 그는 1940년대와 50년대, 판매 성향의 흐름을 파악하고 각들 간의 판매전략을 조정하는 등 불철주야 열심히 일했습니다.
포드사에 들어온 지 약 10년 그의 노력과 재능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아코카는 “56 for 56”이라는 판매 구호를 창안해 냈습니다. 1956년 형 포드 자동차를 20% 선불로 가져가고 3년 동안 월 56달러씩만 내면 된다는 광고였습니다. 그 아이디어는 그가 맡은 지역에서 최대의 판매고를 올리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포드 사는 이를 전국적인 판매 전략으로 채택했습니다. 그 성공으로 아이아코카는 전국 포드 트럭 판매 담당 부사장을 맡게 됐습니다.
아이아코카는 작고 날씬한 머스탱을 개발해 젊은 층은 물론, 스포츠형 자동차를 갖는 게 꿈이던 많은 사람을 매료시켰습니다. 머스탱은 미국 자동차 사상 가장 불티나게 팔린 기록을 수립하며 불과 2년 동안 11억 달러의 순이익을 가져다줬습니다.
시사 주간지 타임과 뉴스위크는 1964년 4월 같은 주에 아이아코카와 머스탱을 표지 기사로 실었습니다. 아이아코카는 자신의 성공이 혼자서 이룬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또 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전적인 신뢰를 갖고 있으며, 다른 이들의 말을 열심히 듣는 사람이라고 겸손해했습니다. 그는 매브릭, 링컨 콘티넨탈 마크3 등도 개발해 냈습니다. 그러나 실패도 있었습니다. 처음 개발한 소형차 핀토가 충돌로 불이 나고 인명 피해도 났습니다.
아이아코카는 1970년 포드사 회장이 됨으로써 헨리 포드 2세를 제외하고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휘발유 가격이 오르고 외국 자동차와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 이 시기 아이아코카는 비용을 줄이고 생산 라인을 축소하는가 하면 이윤이 없는 부서는 폐쇄했습니다. 그는 현명한 관리자들을 지원하고 판매상과 노조로부터도 아이디어를 구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그였지만 한편으로는 개인 제트기로 여행을 다니고 미국과 유럽의 최고급 호텔을 드나드는가 하면 프랭크 시내트라 등 연예인들과 어울리며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습니다. 포드 2세는 그런 아이아코카를 못마땅해 했습니다. 결국 포드 2세는 아이아코카를 해임했습니다. 그해 포드 자동차는 18억 달러의 흑자를 내고 있었습니다.
포드사에서 해임된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아이아코카는 쓰러져 가는 자동차 회사 크라이슬러사의 회장으로 취임했습니다.크라이슬러는 막대한 부채와 계속되는 적자, 신용의 하락으로 회생이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아이아코카는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자신은 연봉을 ‘1달러’만 받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일부 공장을 폐쇄하고 직원 수는 절반으로 줄였습니다. 노조와도 협상해 임금 삭감 등 양보를 얻어냈습니다. 그리고는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아이아코카의 요구에 “쓰러져 가는 기업에 구제금융을 해주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전국적인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의회는 이를 승인하고 지미 카터 대통령은 15억 달러에 달하는 보증안에 서명했습니다. 아이아코카는 그중 12억 달러만 융자를 얻었습니다. 지원을 얻어낸 아이아코카는 크라이슬러 사를 되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 단계는 ‘케이카(K-car)’로 불리는 소형 승용차 개발이었습니다. 연료 효율성이 높고 앞바퀴에 동력이 있는 전륜 구동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폭발적인 인기를 끈 미니밴의 출시였습니다. 7명이 탈수 있는 이 차종은 가족이 함께 탈 수 있고, 짐을 실을 수도 있는 차량이었습니다.
아이아코카는 TV 광고에 직접 출연해 “더 좋은 자동차가 있다면 사라”고 자신 있게 말하며 과감한 판촉 전략을 펼쳤습니다. 1980년 17억 달러 적자이던 기업이 1984년에는 24억 달러 흑자 기업으로 탈바꿈했습니다. 1983년에는 12억 달러의 융자를 마지막으로 갚았습니다. 상환 기간을 7년이나 앞당긴 것이었습니다.
크라이슬러의 자동차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잘 팔려나갔습니다. 주가도 치솟았습니다. 아이아코카의 인기도 올라갔습니다. 당시 미국은 전국적인 침체에 빠져들고 있었고, 포드, 제너럴 모터스 등과의 경쟁은 어느 때보다 치열했습니다. 일본을 비롯한 외국 자동차들도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아이아코카의 성공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아이아코카는 1984년에 자서전을 펴내 즉각 그 해와 다음 해 비소설 베스트 셀러가 되고 수천만 권이 팔려나갔습니다. 독자들은 아이아코카가 당시의 자동차 산업계에 대해 얼마나 예리한 안목을 갖고 있었는지, 또 얼마나 넓은 시야를 갖고 있었는지, 포드 2세가 자신을 왜 해임했는지, 크라이슬러를 어떻게 살렸는지 등 흥미진진한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기적적인 재기에 성공한 아이아코카에게는 많은 찬사가 쏟아졌고 1988년에는 대통령 후보 물망에까지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가 내세운 성공의 기본 전략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멋진 차, 믿을 수 있는 차, 그리고 좋은 보증이 따른 차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범해 보이는 그 같은 전략으로 아이아코카는 몰락해 가던 자동차의 수도 디트로이트를 되살렸습니다.
아이아코카는 1992년 은퇴했습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벨에어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은퇴 후에도 전기 자전거, 올리브 기름 등 여러 곳에 왕성한 투자 활동을 벌이던 그는 차츰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숨진 아이아코카의 시신은, 7월 10일 자신이 꿈의 산업기지로 되살려 놓은 디트로이트로 옮겨져 조용한 교회 묘지에 안장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