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팝 아트(Pop Art)의 아버지, 앤디 워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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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은 팝 아트(Pop Art)로 미국 현대미술에 대단히 중요한 영양을 끼친 화가입니다. 그는 사진작가, 영화 제작자, 음반 제작자, 저술가 등으로 미국 대중 문화 전반의 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앤디 워홀은 1928년 펜실배니아 주 핏즈버그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이민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앤디는 어렸을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앤디 워홀은 카네기 공과대학, 현재의 카네기 멜론 대학에 들어가 상업 미술을 전공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는 뉴욕으로 가서 ‘보그’ ‘하퍼스 바자’ 같은 유명 잡지의 삽화나 광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워홀의 그림은 인기가 높았고 상업 미술가로써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52년에는 ‘아트 디렉터스 클럽 어워드’라는 권위 있는 상도 받았습니다.
1960년대 미국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물질과 대중 문화의 산물인 팝 아트 바람이 불었습니다. 팝 아트 작가들은 순수 미술계의 심각한 화풍을 거부하고, 지금까지 소재로 잘 삼지 않았던, 잡지 속 사진, 음료수 광고, 만화의 컷트 같은 것들을 소재로 했습니다. 한 비평가는 팝 아트를 ‘대중적이고, 저렴하고, 젊고, 대량 생산적이고, 성적인 것이다’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워홀은 한 인터뷰에서 팝 아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 시대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줄여서 말하는 것 같다, 아마 미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워홀은 사람들이 늘 사용하는 흔한 것들을 미술로 탈바꿈 시키면서 본격적으로 팝 아트 운동을 리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워홀이 연작으로 내 놓은 구두 광고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그림이 됐습니다.
1962년 워홀은 첫번째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이 때 내놓은 수프 통조림 그림은 붉은 색과 흰색 통조림 캔으로, 미국의 유명한 식품회사 캠벨의 제품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전시회의 작품은 미술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런 미술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을 준 거죠. 각 그림이 다 똑같이 보이는데 단 한가지 숲의 종류를 표시한 글자만 달랐습니다. 워홀은 또 청량음료인 코카콜라 병, 미국 돈 달러화 표시, 즉 S자에 세로 줄을 그은 것, 청소하는데 사용하는 도구 같은 것을 그렸습니다.
1962년에는 실크 스크린 프린트를 이용해 작품을 많이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실크 스크린이란 이미 그려진 작품을 단 시간에 여러 장 복사해 내는 기법입니다. 바로 미술품의 대량생산입니다.
워홀은 대중적으로 크게 화제가 됐던 것도 자주 그렸습니다. 예를 들면 여배우 메릴린 먼로가 갑자기 사망하자 먼로가 출연한 영화에 나타난 얼굴에, 다양한 색갈을 입혀 대량 생산했습니다. 제트기 사고, 자동차 사고, 재해 등 비극적인 사건도 주제로 삼았습니다.
워홀은 35세때, 뉴욕에 작품 제작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작품을 찍어내는 이곳을 공장, Factory라고 불렀습니다. 워홀은 자신의 작품을 대량생산하기 위해art worker, 즉 예술 노동자로 불리우는 여러 명의 화가들을 고용했습니다.
앤디 워홀은 유명세를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흰 색의 이상한 가발을 쓰는 등 대단히 유별난 모습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는 거의 매일 밤 파티라든가 미모의 여성들이나 유명인사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가곤 했습니다.
워홀은 1960년대 초 여러 편의 저비용 예술영화를 제작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Empire입니다. 이 영화는 뉴욕 시의 초 고층 건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만을 8시간이나 계속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 Sleep은 친구의 자는 모습을 찍었습니다. 이 영화도 여섯 시간 짜리입니다.
왜 그토록 유별난 것을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워홀은 ‘나는 지루한 것,재미가 없는 것이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1960년대 중반에는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라는 록 밴드의 음반을 제작하고 앨범의 표지도 제작했습니다.
워홀의 또 하나 사업은 인터뷰( Interview)라는 잡지 발행이었습니다. 이 잡지는 여러 분야의 미국 대중 문화에 관한 내용들을 실었습니다. 앤디 워홀은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 유명한 인물들을 찾아 인터뷰 해 잡지에 실었습니다. 매 호마다 유명한 인물들의 얼굴이 화려한 색채로 표지에 실렸습니다. 물론 와홀의 그림이었습니다.
1968년 6월 3일 앤디 워홀은 자신이 제작한 영화에 나오는 한 여성으로부터 총격을 받았습니다. 발레리 솔라나스 라는 여성이었는데, 자신이 쓴 희곡을 영화로 만들지 않는데 화가 나서 총을 쏜 것이라고 합니다. 세 발을 쏘았는데, 두 발은 빗나갔지만 세 번째 총알이 그의 양쪽 폐, 위, 식도를 관통했습니다. 의사들은 그가 죽었다고 선언했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죽을 때까지 완전히 그 총격으로부터 회복되지는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1995년에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워홀의 유명세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여러 분야에 손을 대면서도 워홀은 미술 활동을 내려 놓는 일은 없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초상화를 그려 막대한 수입을 올렸습니다. 전 세계의 부호들은 엄청난 돈을 주고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워홀은 1970년 ‘라이프’ 지에 의해서 비틀즈와 함께 '1960년대에 가장 영향력이 있던 인물'로 선정됐습니다.
1982년부터 1986년 사이에는 재해와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마지막 작품은 1986년 ‘레닌의 초상화’ 등입니다.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한 워홀의 그림은 1963년에 제작된 캔버스로 1억 달러에 거래된 ‘여덟 명의 엘비스’(Eight Elvises)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당시 1억 달러라는 가격은 파블로 피카소와 같은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과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앤디 워홀은 1987년 담낭 수술을 받다가 불과 58세로 숨졌습니다. 평생 독신이었던 워홀은 피츠버그에 있는 성 세례자 요한 가톨릭 묘지에 묻혔습니다. 피츠버그 시내에서 강 건너 맞은 편 언덕의 노스 쇼어 지역에는 앤디 워홀 미술관이 세워졌습니다. 개인 예술가 전문 미술관으로서 미국 최대 규모입니다.
자신의 예술이나 생활방식을 통해 대중 문화가 무엇인가를 탐구했던 워홀은, 현대 미술의 정의를 새로 쓰고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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