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세계 최대의 '호텔 왕국'을 건설한 콘래드 힐튼과 배런 힐튼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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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언론은 이달 19일, 세계적인 호텔 기업 총수 배런 힐튼이 91세로 타계한 소식을 보도했습니다. 배런 힐튼은 힐튼 호텔 체인의 창업자 콘래드 힐튼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더욱 거대한 기업을 일으킨 인물이었습니다. 배런 힐튼은 사망하면서 막대한 재산의 97%를,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자선기금에 기부했습니다. 이로써 힐튼 자선기금은 총 63억 달러라는 거대한 규모로 커져 세인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배런 힐튼의 사망에 즈음해 세계 최대의 호텔 기업을 건설했던 그의 부친 콘래드 힐튼의 일생을 대해 다시 한번 조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계 최대의 호텔 기업을 건설한 콘래드 힐튼은 미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 3천600개가 넘는 숙박시설을 거느렸던 호텔업계의 황제였습니다. 콘래드 힐튼은 호텔을 단순히 숙박업에서 벗어나 식당과 카지노, 회의장 등을 갖춘 종합 레저 시설로 변화시킨 탁월한 사업가였습니다.
콘래드 니콜슨 힐튼은 1887년 12월 25일, 뉴멕시코주 산안토니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어거스트 힐튼은 조그마한 잡화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그 상점은 많은 돈을 버는 곳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못살지도 않았습니다. 그 덕에 콘래드는 대학 과정까지 마칠 수 있었습니다.
콘래드 힐튼은 평소에 하고 싶었던 사업이 은행업이라 이곳저곳에 손을 대 보았지만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는 큰 꿈을 이루려면 텍사스로 가라는 지인들의 권유에 따라 텍사스주로 갔습니다. 원유가 대량으로 생산되던 텍사스주에는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스코라는 곳에 있는 평범한 호텔 모블리에 투숙했습니다. 그곳에는 손님이 많이 찾아왔지만 늘 방이 모자랐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사업에 열정이 없었고 호텔을 매각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힐튼은 갖고 있던 5천 달러와 어머니가 준 돈, 그리고 친구와 은행으로부터 빚을 얻어 그 호텔을 샀습니다. 힐튼은 찾아오는 손님들을 수용하기 충분할 만큼 여러 개의 방을 더 늘렸습니다. 당시의 호텔이란 아무것도 없고 그저 방만 있었습니다. 그는 보다 좋은 서비스와 상품을 제공하면 손님들은 기꺼이 비싼 요금을 낼 용의가 있을 것이라는데 착안해 호텔 현관에 조그마한 상점을 열었습니다. 매일 사용하는 신문, 잡지, 면도기, 칫솔, 치약 등 간단한 잡화를 파는 가게였습니다. 그 작은 상점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매상이 높았습니다.
모블리 호텔을 매입한 지 1년 후 그는 포트노스에 두 번째 호텔을 매입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다른 호텔들도 매입합니다. 1924년, 힐튼은 객실 총 수 350개의 호텔 체인을 갖게 됐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자신이 직접 호텔을 지을 수 있을 만한 자금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1925년에는 텍사스주의 대 도시 댈러스에 객실 300개가 있는 대형 호텔을 화려하게 개장했습니다. 댈러스 힐튼 호텔은 콘래드의 이름이 들어간 첫 호텔이자 힐튼 호텔 체인의 고유 명칭이 됐습니다.
그러나 댈러스 힐튼을 시작한 지 3년 후 그에게는 또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전국적인 경제 위기, 대공황이 발생한 겁니다. 그것은 호텔업계에도 타격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전처럼 여행을 다니지 않았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도 출장을 자제했습니다. 80%의 미국 호텔업자들이 무너졌습니다.
힐튼도 여러 개의 호텔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파산 위기까지 몰렸습니다. 그러나 힐튼은 직접 손님을 맞으면서 어려움을 견디어 나갔습니다. 워낙 딱해 보였든지 어느 날은 호텔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벨보이가 300달러를 꾸어 주기도 했다고 힐튼은 종종 이야기했습니다.
얼마 후 콘래드 힐튼의 사업은 점차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는 다시 호텔을 하나씩 사들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2월 그는 시카고에 있는 당시로써는 세계 최대의 숙박 시설이던 스티븐스 호텔을 매입했습니다. 그리고 명칭을 자신의 이름 그대로 콘래드 힐튼 호텔이라고 붙였습니다. 객실이 3천개나 돼 매일 방을 바꾸어가며 투숙을 한다면 7년이 걸리는 규모였습니다.
1949년에는 뉴욕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호텔 월돌프 아스토리아를 매입했습니다. 미국 밖의 첫 호텔로 푸에리토리코에도 호텔을 개장했습니다. 1954년 힐튼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거래를 함으로써 경제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가장 강력한 경쟁사였던 스타틀러 호텔 사를 1억 천100만 달러에 매입한 것입니다.규모가 커짐에 따라 힐튼은 조직을 두 개로 나누었습니다. 미국 국내 시장을 대상으로 한 힐튼 호텔스, 그리고 국제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힐튼 인터내셔널이었습니다.
힐튼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찌 보면 당연한 ‘따뜻한 접대(Warm Hospitality)’였습니다. 힐튼은 종업원들에게 ‘손님은 왕이다’라는 태도로 접객을 하도록 교육시켰습니다. 동시에 고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때까지 없던 여러 가지 혁신적인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로비에 작은 쇼핑 시설을 배치하고, 각 방에 에어 컨디션을 설치했습니다. 방에서 안내원을 거치지 않고 직통으로 전화를 걸 수 있도록 했고, 자명종 시계도 비치했습니다. 공항과 항구 가까이 호텔을 건설해 손님들이 편리하게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힐튼아너스(Hilton Honors)’라 부르는 특별 우대제도도 실시했습니다.
호텔에 도박장, 즉 카지노를 설치한 것도 그가 처음이었습니다. 60년대 라스베이거스에 등장한 카지노 호텔은 기업 내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러나 힐튼이 밀어붙였던 카지노 설치는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객실 영업에서 손실이 나도 카지노만큼은 성황을 이루어 그 손실을 충분히 메꾸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 미국의 관광객과 사업체들이 해외로 대거 퍼져 나감에 따라 힐튼 호텔의 해외 사업도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시대가 달라지고 경쟁도 심해지면서 콘래드 힐튼은 그에 따른 개혁을 계속했습니다. 중앙 예약제를 만들어 세계 어디에서도 전화 한 통화로 예약이 가능하도록 했고, 운영 체계도 가맹점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저가 호텔 체인도 만들어 가격을 낮춘 경쟁사들에 대비했습니다. 콘래드 힐튼은 국제적으로 호텔의 등급을 별 하나에서 다섯까지로 나누는 ‘Five Star’ 시스템도 시작했습니다.
힐튼 호텔이 국제적으로 확산되면서 콘래드 힐튼은 호텔사업이 단순이 돈벌이뿐만 아니라 국제 이해와 교만함 제거, 평화에 기여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1966년 콘래드 힐튼은 일선 경영을 아들 배런 힐튼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서전 “Be My Guest”를 집필했습니다. 자서전은 힐튼 왕국을 건설하기까지의 과정, 고객을 위한 서비스의 정신 등을 담고 있어, 호텔 사업의 경전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콘래드 힐튼은 또 세계 여러 나라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한 힐튼 자선기금을 설립했습니다.
그는 1979년 캘리포니아에서 91세로 타계했습니다. 그리고 맨 처음 호텔을 시작했던 텍사스주 댈러스에 있는 가톨릭 묘지에 묻혔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자신의 몫으로 된 재산은 모두 이 자선 기금에 기증됐습니다.
힐튼 타계 후 그의 사업은 장남 배런 힐튼이 이어받았습니다. 호텔 업계에는 많은 변화가 일었고 강력한 경쟁사들이 등장해 힐튼 사가 반드시 1위를 고수하기도 어렵게 됐습니다.
그러나 힐튼 월드와이드 홀딩스로 명칭이 바뀐 힐튼 왕국은 2018년 현재 104개국에 4천900여 개의 시설, 80만 개의 객실을 갖춘 거대 기업으로 남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배론 힐튼은 호텔 사업에 머물지 않고 오렌지 주스 사업, 석유 사업, 프로 스포츠인 아메리칸 풋볼리그, 항공기 임대사업 등으로 기업을 더욱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뜻을 충실히 이어받아 대부분의 재산을 자선기금에 남겨 놓고 세상을 하직했다는 점에서 세인의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