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문화, 다양한 인종이 함께 모여사는 미국,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오늘은 흑인으로서 첫 국무장관을 지낸 콜린 파월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뉴욕 시 가난한 흑인 동네에서 자란 콜린 파월은 인종 차별의 장벽을 뚫고 군인, 정치인, 외교관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된 인물이었습니다.
콜린 파월은 1937년 4월 5일 뉴욕시의 최빈곤 지역인 할렘의 사우스 브롱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자메이카에서 이민온 분들이었습니다.
파월은 모리스 고등학교를 거쳐 뉴욕 시립대학에서 지질학을 전공했습니다. 재학중 파월은 대학생 장교 훈련 과정인 ROTC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1958년 대학 졸업과 함께 소위로 임관됐습니다.
파월은 나중에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90년에는 명예 박사학위도 받았습니다.
파월은 대학에서 성적이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장교로 임관된 후에는 놀라울 만큼 군인으로써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임관 후 처음으로 주어진 임무는 서독 주재 미군 부대의 소대장이었습니다. 당시는 동서 냉전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베트남 전에는 두번이나 참전했습니다. 1962년과 63년에는 월남군 고문으로 복무했습니다. 이때 파월은 전선을 순찰하던 도중 베트콩이 매설한 지뢰가 터져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파월은 Purple Heart훈장을 받았습니다.
육군 기갑사단을 거쳐 23보병사단에 있던 1968년 그는 두번째 월남에 파병됐습니다. 어느 날 파월은 헬리콥터가 추락해 화염에 쌓이는 위기를 당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불길 속에서 동료병사들을 구출했습니다. 그 공로로 파월은 Soldier's Medal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외에도 군 복무 중 많은 훈장과 메달을 받았습니다.
파월의 능력이 인정을 받고 고속 승진을 했지만 그것은 1960년대 극심했던 인종차별과 민권운동이 벌어지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파월은 자서전에서 자신을 포함한 많은 흑인 병사들이 베트남 전에서 고생을 하고 돌아왔어도 모국에 돌아와서는 차별을 받아야 했던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파월은 1973년과 74년 주한 미군에서도 대대장으로 복무했습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한국에 있었을 때가 군 생활 중 가장 만족스럽고 활력이 넘쳤던 때라고 회고했습니다.
그후 기갑사단, 공수사단 등 여러 곳을 거친 콜린 파월은 로날드 레건 대통령 재임 중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의 군사고문으로 임명됐습니다. 1987년49세 때 중장으로 진급한 콜린 파월은 3년 동안 레이건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했습니다.
1989년에는 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그후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콜린 파월을 합동참모본부 의장으로 임명했습니다. 12대 합참의장이 된 그는 당시 52세로 역대 최연소이자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이었습니다.
1989년부터 93년까지 합참의장 재임 중, 그는1989년의 파나마 침공, 1992년 소말리아 침공 등 크고 작은 28건의 분쟁을 처리했습니다.
1991에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물리치기 위한 사막의 폭풍 작전을 총 지휘했습니다. 쿠웨이트를 해방시킨 콜린 파월 장군은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군사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후 파월은 의회 금메달을 수상하고, 대통령 자유 메달도 받았습니다.
그는 늘, 군사행동을 할 때는, 그 목표가 반드시 성공 가능성이 있어야 하며, 일단 그런 판단이 섰을 경우 압도적인 무력을 동원해 결판을 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전략은 파월 독트린으로 불리웠습니다.
1993년 콜린 파월은 35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전역했습니다. 파월 장군은 나는 언제나 군인이다, 군인이 아니었다면 35년이란 세월을 군에서 복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파월 장군 전역때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재능과 능력,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꿈을 달성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라며, 4성장군 파월의 생애는 바로 아메리칸 드림의 승리라고 말했습니다.
전역하면서 파월 장군은 두번째 대통령 자유 메달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해 영국 여왕은 그에게 영국 기사단 훈장인 바스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파월의 인기가 높자 민주 공화 양당은 그를 당의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파월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며 그런 제의를 거부했습니다. 세간에서는 부인 앨마 존슨 여사가 암살 위험을 염려해 정치에 나가는 것을 만류했다는 설도 나왔습니다.
군에서 물러났지만 현실은 파월을 그냥 쉬게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2001년 9월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테러공격으로 폭파됐습니다.
사건이 발생하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콜린 파월을 다시 불러 국무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신임 국무장관은 다른 여러 나라들과의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테러와의 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어야 했습니다. 파월 장관은 유엔에 나가 이라크 응징의 당위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유엔 안보리에서 이라크 지도자 사담 훗세인이 생물무기를 갖고 있으며, 국제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대량살상무기 해제를 위한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2003년 이라크 침공 후 대량살상 무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침공작전은 잘못된 정보보고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파월 장관은 자신의 주장을 깊은 유감으로 생각했으며, 다음 해 국무장관직을 사임했습니다.
콜린 파월은 한번 결정하면 과감하게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전략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지만 싸우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 군인이었습다.
“나는 언제나 세계의 분쟁을 외교와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강력히 믿어왔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만족할만 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그렇게 밀고 나가야 한다”고 그는 늘 말했습니다.
콜린 파월은 융통성 있는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2005년 국무장관에서 물러난 뒤 그는 공화당 소속이었지만 민주당 대통령 후보들을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콜린 파월은 공직에서 물러났지만 미래의 세대를 위한 지원활동도 적극적으로 전개했습니다. 어려운 젊은이들에게 장래를 약속해주기 위해 전임 대통령들과 함께 조직한 미국 Promise 연맹, 모교인 뉴욕 시립대학에 설립된 콜린 파월 스쿨은 그가 특히 열정을 바친 곳이었습니다.
말년에 들어 골수종과 파킨슨 초기 증세로 치료를 받던 콜린 파월은 백신 2차 접종까지 받았음에도 코로나바이러스 합병증으로 지난 10월 18일 84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