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찾기 위해 결단력 하나로 고향을 떠난 한 탈북민이 있습니다. 바로 북한 라선특별시 출신인 심하윤 씨인데요. 탈북민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탈북민의 세상 보기’, 오늘은 탈북 유튜버로 활동하는 심하윤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서울에서 동예원 기자입니다.
[녹취: 유튜브 현장음]
탈북 유튜버 심하윤 씨가 운영하는 심하윤 TV. 탈북민 심하윤 씨와 탈북민 윤설미 씨가 ‘탈북민이 한국에 살면서 소속감과 연대감이 생기는 순간’에 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심하윤 씨는 2008년 탈북해 2009년 한국에 정착했는데요. 북한에서는 안내 통역원으로 일했습니다. 주로 중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안내하는 일이었는데요. 4년째에 접어들 때쯤 일에 회의를 느꼈다고 합니다.
[녹취: 심하윤 씨] “제가 북한에서 안내 통역원으로 일하면서 외부에 대한 정보를 이미 북한에서 터득했고 그러다 보니까 이렇게 살기 싫다는 생각 끝에 두만강을 넘었습니다. 솔직히 그때 당시 넘어올 때는 한국 가야겠다는 결정을 내리진 않았고요. 중국어가 되기 때문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제가 신분증을 만들면서 한국 회사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 제가 처음 ‘다음’이라는, ‘네이버’ 이런 사이트에 접속하게 됩니다. 그때 거기를 보면서 나와 같은 처지의 탈북자들이 어디 가서 살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탈북민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거든요. 그럼 이 사람들이 어떻게 갔을까? 검색해보니까 '새터민들의 쉼터'라는 사이트가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보니까 가는 방법이 거기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 가겠다고 연락처를 남기고 그분(브로커)이 저에게 연락이 왔죠.”
한국 회사에 들어가게 되면서 심하윤 씨는 북한과 탈북민에 관한 정보를 더 쉽게 얻었습니다. 또한 인터넷으로 검색하면서 자신을 한국으로 데려다 줄 브로커를 직접 찾았고요. 그 당시 많은 브로커에게 연락이 왔는데 심하윤 씨는 정말 목숨을 걸고 한 명을 선택했다고 해요. 다행히도 그 브로커를 통해 한국으로 안전하게 올 수 있었고요. 심하윤 씨는 중국의 한국 회사에서 만난 지금의 남편을 따라 탈북 8개월 만에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녹취: 심하윤 씨] “오자마자 결혼했어요. (하나원) 나오자마자 3개월 만에 식 올렸거든요. 예식장을 다 잡아놓고 기다리더라고요. 그래서 결혼했죠. 그렇게 하고 대학교 갔어요. 제가 북한에서도 상업 대학을 졸업했는데 한국의 학벌을 가지고 싶었어요. 북한이탈주민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어차피 27살밖에 안 됐고 그러면 여기서 말투만 싹 고치면 누구도 나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 흠집을 잡거나 물어보진 않을 거다, 마음속에 내가 탈북자라는 콤플렉스가 어마어마했던 거예요. 이게 어떤 그 핸디캡으로 남아서 가끔 탈북자라는 시선이 그때는 곱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런 목적 때문에 가야겠다고 해서 제가 충남대학교에 갔죠.”
심하윤 씨는 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실행력이 빠른 성격이라고 합니다. 한국에 정착한 뒤 바로 결혼하고 또 새로운 정착 생활을 위해 충남대학교에 입학했는데요. 그곳에서 경영학부 회계학과 4년제로 졸업을 하고 사회로 나오니 33살이 됐습니다. 그런데 막상 취업의 현실은 막막했다고 해요. 그래서 잠깐 계약직으로 1년 일하다 다시 대학교에 들어갑니다.
[녹취: 심하윤 씨]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면 저는 대전에 집을 받았기 때문에 충남대학교에 다녔는데 가끔 애들이 '야 나 연세대 다녀.' 이런 말을 하길래 나도 북한에서도 학벌이 좋았는데 여기 와서 '나도 학벌, 서울대 가볼까?' 이런 야망이 있어서 서울에 있는 학교를 도전했어요. 사실 앞쪽에 얘기하면 처음에 왔을 때 편입하려고 연세대학교와 이화여대를 제가 편입 시험을 넣었습니다. 그래서 연세대 중어중문학과, 이화여대를 넣었거든요. 그러다 제가 둘 다 편입에 떨어졌어요. 그때는 편입하려고 하면 토익 성적이 필수로 있어야 하고 논술 같은 시험도 잘 봐야 했거든요. 근데 토익도 없었고 그냥 깡으로 자소서도 썼기 때문에 불합격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충남대 1학년부터 다녀야겠다고 해서 갔던 거라...”
그렇게 심하윤 씨는 정착하자마자 편입하려고 했던 이화여자대학교에 재도전을 합니다. 충남대학교 4년제를 졸업한 뒤였기 때문에 일반대학원으로 들어갔고요.
그곳에서 북한학과를 다니면서 북한학을 다뤘는데요. 이 수업을 통해 자신이 몰랐던 북한에 관해 더 체계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녹취: 심하윤 씨] “오히려 제가 북한에서 살 때보다 대학교에서 일반대학원 북한학과에서 공부했는데 오히려 제가 살았던 북한의 모순점과 우리가 어릴 적부터 뭔가 공부하고 배웠던 교육의 주체사상의 기본적인 허점이 무엇인지 남한에서 더 잘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아니까 아는 만큼 보이고 조금 더 체계적으로 아니까 분노도 동반 상승하고 북한에 있는 주민들 내 부모님과 형제들 생각하니까 이대로 앉아서 언제면 저게 문이 열리고 저 사람들에게 자유라는 걸 선사할 수 있을까? 자유라는 단어가 저는 항상 부풀거든요. 부모님은 아직 저러고 사는데 그런 데서부터 출발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오늘날까지 온 거예요.”
그렇게 북한학을 배우며 심하윤 씨는 북녘에 남아있는 가족들, 북한 주민의 자유를 생각하게 됐고요. 북한에서도 안내 통역원 일을 했기 때문에 언변이 좋았던 심하윤 씨에게 탈북 지인들은 강사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말을 전했습니다.
[녹취: 심하윤 씨] “강연 같은 건 좀 다녔습니다. 2015년부터 '언니는 이 아까운 재능을 왜 안 쓰나요?' 그러더라고요. 저는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강연하고 이런 건 몰랐거든요. 저는 그냥 동네에서 알바하고 그랬는데 그 주변에 있는 탈북민이 '가능성이 충분한데 강연해라.' 그래서 강연의 길에 들어섰고 그게 또 확장돼서 여러 가지 강의하면서 나의 어떤 천부적인 재능을 찾았다고 해야 하나? 제가 말을 논리 있게 하는 건 아닌데 머릿속에 대본 없이도 말을 쭉쭉 하긴 하더라고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건 조금 잘하니까 뭐든지 자기가 잘하는 재능을 발휘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게 제일 좋더라고요. 그래서 하다 보니까 유튜브까지 어떻게 왔습니다.”
심하윤 씨는 지난 2020년 8월에 자기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만 해도 탈북 유튜버들의 채널이 약 100개 정도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어떤 주제를 다뤄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고 하는데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처음에는 기존의 다른 채널을 보며 그 노하우를 배웠다고 했고요. 심하윤 씨는 일상생활을 찍어 인터넷에 공개하는 ‘브이로그’의 중요성도 빼놓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심하윤 씨] “북한의 이슈를 제 눈높이에서 다루는 거고 일상에서 사는, 제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섞는 브이로그도 같이 하는데 그 이유는 여기까지 넘어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를, 일상의 마트에 가서 장보고 사실 시시껄렁한 거를 자주 보여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저도 마음먹고 촬영해야 하는데 너무 바쁘다 보니까 그걸 못하고 있는데 그런 게 훨씬 더 잘 먹힐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브이로그도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만든 영상이 한국 시민뿐만 아니라 특히 북한 주민과 제3국에서 떠도는 탈북민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심하윤 씨] “외부에 있는 3국이나 중국, 러시아에 떠도는 사람들이 올까, 말까 고민을 많이 하거든요. 근데 많은 탈북자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 나라에서 사는 게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사는 것보다 얼마나 멋지게 사는지, 잘 정착하고 또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람들이 그런 일상을 많이 올려서 '나도 잘 살아야지.'라는 야심을, 그리고 어떤 자극제, 촉매제 역할을 하는 역할도 분명히 있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북한 사람들도 봤으면 좋겠고 외국에 있는 사람들도 보여주는 용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합니다.”
심하윤 씨는 유튜브 활동하며 가장 뿌듯한 점에 대해 구독자들이 자신을 알아봐 줄 때라고 말했습니다. 홀로 탈북한 심하윤 씨에게는 자신을 알아봐 줄 사람이 한국에 생긴 것이 너무나 감사했던 거죠. 그래서 이 활동이 자신을 살게 하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고요. 앞으로는 활동 영역을 더욱 넓혀가고 싶다고 합니다.
[녹취: 심하윤 씨] “영어에 대한 욕심이 조금 생겨요. 제가 언어에 관심이 많거든요. 영어 채널 열고 그 사람들에게 북한 인권에 대해서 북한 주민들의 자유가 없는 삶에 대해서 알려주는 거 해야 하겠다는 목표가 있어요. 제가 못하면 저희 아이들이라도 영어를 잘해서 통일이 안 된다면 20, 30, 40년 후에도 북한 주민들의 삶은 처참할 건데 그걸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우리가 못하면 영어가 안 돼서 못 할 수 있겠죠. 영어로 할 수 있는, 탈북민 자녀가 엄마 이야기를 듣고 할 수 있는 그런 걸 만들고 싶습니다.”
심하윤 씨는 현재 자기 삶에 대한 만족도가 아주 높다고 말했는데요. 하지만 하나 바람이 있다면 삶의 여유를 찾고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고 싶다고 합니다.
[녹취: 심하윤 씨] “차분히 앉아서 원하는 책을 좀 많이 읽고 싶어요. 시간이 없습니다. 강의하고 일하고 하느라고 지적인 욕구가 되게 많은데 그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건 책이거든요. 근데 독서를 많이 하냐, 그렇진 못해요. 솔직히 못 해요. 그렇지만 우리 집에 와보면 이쪽저쪽 방에 책이 많고 책에 대한 욕심이 무한히 많거든요. 그래서 어떤 지식이든 간에 제가 매력을 느끼는 두 가지 장르가 있는데 유튜브에서 대방출해서 '그래도 탈북했는데 이 정도면 남한에서 태어난 애들보다 똑똑하네'라는 얘기를 듣고 싶어요.”
서울에서 VOA 동예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