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탈북 여성의 삶을 남한 출신 엘리트 여성과의 대화를 통해 보여주는 책이 최근 미국에서 출간돼 주목받고 있습니다. 미 주류 언론이 잇따라 주목할 책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북한 주민들의 일상을 소개하면서 서로의 다름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많은 독자에게 영감을 준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김영권 기자가 책의 두 저자와 전화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10대 때부터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 등 외국에서 보낸 한국계 영국인 채세린 씨는 2014년 런던에서 난생처음 탈북민을 만났습니다.
채 씨는 당시 두근거리던 심정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50대 중반으로 한국에서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고 자랐고 외국에서조차 북한인들에 대해 조심하라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선입견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녹취: 채세린 작가] “그때 한창 외국에 있는 한국인들이 납치를 당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슈퍼마켓에 갈 때도 엄마 손을 꼭 잡고 카트를 벗어나지 못하게 멀리 못 가게 했던 생각이 지금도 납니다. 굉장히 무서워했죠. 납치당할까 봐”
국제앰네스티가 영국에 사는 탈북 여성 박지현 씨 영상을 제작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면서 채 씨에게는 또 다른 북한의 문이 열렸습니다.
[녹취: 채세린 작가] “처음에는 겁도 많고 불편했고 내가 이런 사람과 대화해도 되나? 북한 사람하고 얘기하면 당장 한국 대사관에 가서 신고하고 그러는 걸로 알았기 때문에 굉장히 긴장하고 만났죠. 그런데 그분 얘기 듣고 나니까 나이도 비슷하고 영국에서 아이도 키우고 여자로서 궁금한 게 많아지더라고요”
북한에서는 출산을 집에서 하는지 아니면 병원에서 하는지, 집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고 학교에는 어떤 교복을 입는지, 또래의 친구들과는 어떤 놀이를 하는지.
런던에 살던 채세린 씨는 이런 호기심이 커지면서 맨체스터에 사는 박지현 씨와 서로 오가고 때로는 전화하며 친구가 돼 갔습니다.
북한에서 가난을 피해 탈출해 중국에서 강제 결혼과 북송, 재탈출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영국에 정착한 박지현 씨도 채 씨의 자유로운 말투에 호감이 갔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박지현 씨] “많은 사람들은 남북한 사람들이 같은 언어를 쓴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언어 박해를 받아왔던 제가 자유로운 언어를 쓰는 한국 여성에 의해서 저의 인간적인 감정, 인간의 언어를 다시 찾았다고 할까요?”
북한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다 표현하면 말반동으로 체포될 수 있어 주로 정치적 언어를 구사하다 보니 표현력이 풍부한 채 씨에게 매료됐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대학을 다니고 미국의 명문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공부한 뒤 JP 모건 등 세계적인 투자은행에서 근무하며 자유롭게 살던 채 씨와 기본적 자유를 박탈당하며 살았던 박 씨의 너무나 다른 인생은 영국에서 교차점을 발견했습니다.
[녹취: 채서린 작가] “서로 불편함 또는 선입견 등을 3년이란 세월 동안 다 이겨내고 제게 부탁을 하더라고요. 책을 같이 쓰면 어떻겠냐고요.”
주위에서 영화 같은 삶을 책으로 출판하자는 제의를 자주 받으면서도 말주변이 없어 고사했던 박 씨는 채 씨와 계속 교제하면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채 씨와 대화하면서 지옥 같기만 했던 자신의 삶에서도 잠시 행복했던 유년 시절, 할머니에 대한 추억 등 인간적인 추억을 떠올렸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치유도 많이 됐다는 것입니다.
[녹취: 박지현 씨] “탈북민들이 글을 쓸 때 본인의 감정을 호소할 때 다 못하는 게 있어요. 정치성 때문에 인간의 감정이 못 나옵니다. 그런 것을 한국분이 도와주면 언어도 찾고 육체적으로 받았던 정신적 스트레스도 함께 많이 해소가 되더라고요. 많이 치료되고 치유도 되고. 특히 여자는 남자에게 남편이라도 숨기고 싶은 얘기가 있잖아요. 근데 여자와 얘기하다 보면 진짜 한이 맺혔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는 거죠.”
이렇게 둘이 만난 지 5년 뒤인 2019년 드디어 책이 세상에 첫선을 보였습니다.
제목은 ‘가려진 세계를 넘어(Hard Road Out).
북한 독재자의 횡포나 인권 실상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박지현 씨가 자라온 일반 북한 주민들의 삶, 이를 채세린 씨의 시각으로 풀어가면서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고 친구가 되어 가는 과정들을 담담하게 쓴 것입니다.
[녹취: 채세린 작가] “한국 사람으로서 책을 쓰면서 너무 힘들어했던 이유가 담겨있어요. 그리고 자기가 갖고 있었던 선입견을 버리고 그다음에 다시 깨끗한 종이 한 장에 이 사람에 대한 감정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그 전의 감정들을 다 지우고.”
채 씨와 박 씨는 이 책에 ‘희망’이 담겨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다른 체제에서 자란 사람들이 친구가 될 수 있으면 여러분도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긍정적 메시지를 세상 모든 독자에게 보낸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책에는 만성적인 영양실조 속에서 표현과 이동의 자유도 없이 살아가는 북한 주민들의 일상을 박 씨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 이런 실상을 전혀 모르고 살았던 채 씨의 미안함과 안타까운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채 씨는 “강제로 전달하기보다 북한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펼쳐 놓고 이에 대한 생각과 결정권은 독자들에게 맡기는 것이 이 책이 기존의 북한 관련 책들과 다른 특징”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책은 프랑스어가 모국어처럼 편한 채 씨가 발로 뛰어 프랑스에서 먼저 출간됐고 이어 2020년에는 타이완에서 중국어로, 2021년 한국어, 작년에는 영국에서 영어로 출간됐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31일에는 뉴욕에서 미국판 발간 행사가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습니다.
이날 기념회에는 황준국 주유엔 한국대사, JP 모건과 골드만삭스 임원 등 뉴욕에서 활동하는 각계각층의 인사 1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책을 ‘1월의 주목할 만한 10대 서적”으로 꼽았습니다.
이 신문은 서로 다른 체제에서 자란 두 여성이 얼마나 많은 공통점이 있는지 알게 되는 과정을 통해 통일된 미래에 대한 그들의 희망에 대해 글을 쓰도록 영감을 줬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ABC, CNN 방송 등 주류 매체들도 최근 두 작가를 인터뷰해 방송했으며, 아마존 등 미국의 인터넷 서점에서도 좋은 평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녹취: 채세린 작가] “사람들이 왜 관심이 있나 생각해 보니까 우리의 다른 점을 극복하는 과정이 힘들었는데, 이 테마는 우리만 느끼는 게 아니라 세계적으로 모든 나라에서 분열이 있잖아요. 그 분열을 극복하는 한 사람과 한 사람의 개인적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느 정도 희망이 생긴다는 메시지죠.”
채세린 씨는 또 “이 책은 그저 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박지현 씨가 반전의 삶을 통해 주위에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며 계속 써 가는 삶의 여정”이기도 하다고 말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어려운 시기에 마스크를 동네 영국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선을 베푸는 모습, 아시아여성상과 인권상을 받고 “보수당 후보로 지방선거에도 도전하는 박 씨의 모습을 통해 어려운 처지에 있는 많은 사람이 영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채 씨는 박 씨가 더 이상 피해자의 사슬에 묶여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박지현 씨는 이 책의 미국 출판을 맞아 김정은과 핵·미사일에 주로 집중된 사람들의 시선이 북한 주민들로 옮겨지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박지현 씨] “북한은 핵이 있고 김정은이 있고. 북한 사람들마저 세계를 위협하는 것으로 묘사가 됩니다. 이 책을 통해 북한 사람들도 감정을 가진 진솔한 사람들이란 것. 사회주의가 어떻게 사람들을 세뇌하고 생각을 강제로 파괴하는지를 봤으면 좋겠어요.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