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의 세상보기] 인민군 소령 출신 차성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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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인민군 소령이었던 차성주 씨가 남북을 잇는 소통창구가 되기 위해 한국 시민들과 만나는 열린 문화 강좌에 참여했습니다. 최근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벽을 넘은 인터뷰'라는 이름으로 차성주 씨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시간이 마련됐는데요. 탈북민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탈북민의 세상 보기', 오늘은 탈북민 차성주 씨의 이야기 전해 드립니다.

북한에서 인민군 소령이었던 차성주 씨가 남북을 잇는 소통창구가 되기 위해 한국 시민들과 만나는 열린 문화 강좌에 참여했습니다. 최근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벽을 넘은 인터뷰’라는 이름으로 차성주 씨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시간이 마련됐는데요. 탈북민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탈북민의 세상 보기’, 오늘은 탈북민 차성주 씨의 이야기 전해 드립니다. 서울에서 동예원 기자입니다.

[녹취: 강연 현장음]

현재 ‘남북평화공존연구소’의 소장으로 활동하는 탈북민 차성주 씨가 관객들의 질문에 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벽을 넘은 인터뷰는’ 한국으로 넘어와 자기 경험을 쌓고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탈북민의 솔직한 얘기를 듣는 토크콘서트인데요. 행사를 마친 차성주 씨의 소감은 어떨까요?

[녹취: 차성주 씨] “북한이탈주민들은 이산가족이죠. 그래서 통일 한국에 대해서 굉장히 이해관계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또 탈북민이에요. 그래서 남북통일 운동에 대한 그 사명감 이런 것을 운명처럼 가지고 있다. 이런 데서 오늘 그 수많은 대중 앞에서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 내가 살아온 그 과정이 오늘날 결실 본 것에서 또 긍지도 있고 그 통일 관계 문제에서 남한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느냐 그런 청중들의 질문에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이날 프로그램은 3시간 동안 진행됐습니다. 북한에서의 생활과 탈북 계기, 과정까지 관객들은 차성주 씨에 관한 세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요.

[녹취: 차성주 씨] “원래 내가 고향이, 뿌리가 전라도 광주라고 그랬죠. 그래서 아버님이 그 전쟁 때 북한으로 가게 된 사연, 북한에서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어떻게 살아온 과정 이 모든 과정을 이렇게 쭉 얘기하면서 우리 분단의 슬픔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또 여기 와서 남한에 있는 우리 아버지 그 형제들 다 만나고 그런 과정을 쭉 이야기했죠.”

북한에서는 인민군 소령이었던 그가 탈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녹취: 차성주 씨] “탈북한다는 게 뭐 북한에서는 뭐 남한 방송 듣는 거 그게 굉장히 중범죄거든요. 그러니까 정치범 수용소 간다는 거는 무기징역인데 그 죽음이죠. 그러니까 자유를 찾아온 것이지요. 그쯤에 철책 넘어 지뢰가 많잖아요. 그러니까 땅으로 가지 않고 예성강 하구 물로 나가서 저 교동도로 갔죠. 수영해서 간 거죠. 그러니까 수영을 잘하지만 거리가 하도 멀기 때문에 구명대는, 구명대라는 게 일반 무슨 고무 튜브가 아니고 그 플라스틱 통 그거를 몸에다 달고 구명대처럼 그렇게 왔죠.

그렇게 그는 1997년 철책을 넘어 예성강 하구에서 강화도 교동도로 헤엄쳐 왔습니다.

[녹취: 차성주 씨] “힘들죠. 이게 가까이 보이지마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데 ‘아, 이게 오다가 이제 뭐 사는 거보다는 그 뭍에 발이 닿는 그 뭍에 가서 편안히 누워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참 7시간 동안 왔으니까… 오는 과정에 뭐 저쪽에 국군심리전단 거기 그 아나운서가 방송하면서 ‘인민군 병사들이여, 총부리를 돌리고 남한으로 돌아오라.’ 고 이런 방송 하길래 ‘나 지금 가고 있잖아.’ 하면서 그러면서 에피소드죠. 그렇게 하면서 온 거예요.”

그렇게 한국 땅을 밟은 차성주 씨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적응하기 위해 또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을 위해 끊임없이 공부했습니다.

[녹취: 차성주 씨] “저기 황장엽 선생이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이고 제가 거기 사무국장을 했거든요. 그때 보니까 언론과 접촉도 하고 또 외교부에 탈북민 강제 북송을 저지해 달라는 공문도 보내고 UN과 미국에 공개서한도 보내면서 보니까 정치사회학에 대한 기초 지식을 많이 알아야 하겠더라고요. 그다음에 우리가 통일이라든가 안보라든가 또는 북한 인권에 대해서 방송에 나가서 얘기하자고 해도 그게 상당한 정치사회학 지식을 요구하거든요. 그래서 얘기가 안 되는 정도면 요구라든가 기대를 그들에게 호소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정치 사회에 대한 깊은 지식을 배워야겠다… 공부를 많이 했죠.”

그렇게 경기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요. 차성주 씨는 지금까지 자신이 노력한 만큼, 정착에 성공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녹취: 차성주 씨] “여기 와서 돈 많이 벌면 성공한 것이냐, 무슨 사업장이 잘 됐다 하니까 한국 사회 정착에 성공했대. 일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그게 성공한 것이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보람 있게 내가, 내 삶이 보람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한국 사회 정착에 성공했다고 보는데, 처음에 와서 배우지도 못하고 시장 경제를 잘 모르니까 이런 속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배우고, 시장 경제도 이해하고 나처럼 박사가 돼서 학문적으로 기여도 하면서 한국 사회의 중심에서 사는데 그런 사람들과 나란히 사는 것, 그런 삶을 보람 있게 생각하는 것, 나는 그것이 한국 사회 정착에 성공했다고 보기 때문에 그런 시각에서 보면 나는 정착에 성공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 차성주 씨는 자신이 이끄는 ‘남북평화공존연구소’의 역할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녹취: 차성주 씨] “내가 박사 논문에서 ‘유엔군사령부 역할을 재구성해 한반도 평화 공존을 공고히 하자.’ 이 주제를 가지고 썼거든요. 싱크탱크(Think tank)라면 ‘남북평화공존연구소’는 액션탱크(action tank)다. 실천하기 위한 조직이다. 이렇게 보면 돼요. 한반도 정전 체제가 남한과 북한이 정치적으로 합의만 하면 평화협정도 체결할 수 있고 이런 체제가 아니에요. 미 유엔군, 중국, 북한 이렇게 해서 국제사회가 컨트롤하는 국제 안보 신탁 통치 체제란 말이에요. 남북한이 정치적으로 합의했다고 해도 유엔군사령부가 승인하지 않으면 정전협정 조문에 한 글자도 못 고쳐요. 안보 통치권이 유엔군사령부에 있다는 거죠. 이 역할을 재구성해서 유엔군사령부가 지금은 한반도 남한 측의 안보만 보장하는데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의 안보를 유엔군사령부가 담당하라, 그래서 국제사회가 북한의 안전을 보장해서 북한의 우려를 불식 시켜주고 북한은 핵을 폐기해라,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 이런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는 더욱 활발히 활동할 계획이라고 하는데요.

[녹취: 차성주 씨] “목표는 어떤 새로운 한반도 평화 체제를 위해서 내놓은 방안이 있잖아요. 이런 평화 방안을 구체적으로 여러 가지 내놓은 게 있거든요. 그것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그다음에 유엔 사무총장에게 제안서를 서한으로 발송할 거예요. 그런 활동을 해서 남북이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그걸 또 공고히 할 수 있는 그런 안보 체제를 구축하자. 이런 것을 계속 호소해 나가는 활동을 하고 또 세미나도 하고 포럼도 하고 이런 활동을 많이 진행하려고 해요.”

이날 토크콘서트 현장에는 많은 남북한 출신의 관객이 함께했는데요. 그중에서도 남한 출신의 관객 비율이 더 높았습니다. 그래서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더 많은 질문을 던지기도 했고요. 탈북민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그들의 아픔이 와닿고 지금까지 얼마큼 노력했는지가 느껴져 존경스럽다고 전한 한국 시민도 있었습니다.

[녹취: 장경희 씨] “일단 인민군 소령이면 군인이니까 어떻게 탈북했고 남북을 잇는 소통 창구가 된다고 하셨는데 한국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들으러 왔습니다. 탈북민이 한국에서 살기가 정말 쉽지 않구나. 형제, 가족이라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아서 아, 이분들이 참 한국 살기 힘들지만 그래도 훌륭하게 정말 잘 사신 것 같아요. 이분 같은 경우는 강사도 하시고 연구소 소장님도 하셔서 한국에서 잘 사신 거에 대해서 저는 탈북민은 아니지만 되게 배울 게 많더라고요. 저렇게 열심히 사셨으니까 이렇게 잘 사시는구나 하고 그게 존경스러웠어요.”

[녹취: 김현옥 씨] “직접 탈북하셔서 남한에 오셔서 열심히 생활하신 분한테 들으니 더 구체적이었고 어쨌든 북한에서 살다가 이쪽으로 와서 적응하기도 힘들었을 테고 그러면 또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것도 많은 한계가 있을 텐데 어떤 말 하지 못한, 탈북민들의 고충 그런 것들을 문맥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고 할까요? 그런 아픔, 아버님에 관한 얘기도 그렇고 그런 부분이 가슴에 많이 와닿았고 마음이 아팠다고나 할까….”

[녹취: 박순한 씨] “방송에서는 그냥 방송이니까 그렇다고 했는데 피부로 와 닿고 실감 났어요. 저는 제 아들이 북한학과를 전공했어요. 지금 서울시 공무원인데 그래서 걔가 개성공단 가서도 근무해 봤거든요. 개성공단 갈 때 휴대전화를 못 가지고 가요. 책도 못 가지고 가요. 그걸 보면서 빨리 남북통일이 돼야 하겠다. 진짜 우리 동포가 살고 있는 북한은 못 가보잖아요. 기차 타고 가고 싶고, 전철 타고 가고 싶어요. 그래서 이런 세미나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어요.”

서울에서 VOA 동예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