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의회가 지난 2004년 제정한 북한인권법에 근거해 미국에 처음 입국했던 탈북 난민 1호 데보라 최 씨가 최근 한 탈북 지원단체 이사에 선임됐습니다. 미 동부에서 부동산업 등에 종사하는 최 씨는 지난 17년 사이 미국에 정착한 탈북민 220여명 중 다수가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며, 이제 탈북 1세대가 후배들을 도울 때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남북한의 최대 명절인 추석을 맞아서 동료 탈북민들을 돕는 활동을 펴고 있는 데보라 최 씨를 김영권 기자가 전화로 인터뷰했습니다.
기자) 미국 내 탈북 난민들의 정착을 지원하고 유일하게 해마다 탈북 난민 수련회를 개최하는 ‘두리하나USA’의 이사로 최근 선임됐습니다. 이런 단체에 탈북민이 이사가 된 것은 처음으로 압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데보라 최) 두리하나 USA 단체는 목사님들과 이사님들이 16년간 사랑과 헌신으로 꾸준히 저희 탈북민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저희들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잘 정착하게 되었어요. 근데 저희가 언제까지 마냥 그분들의 도움만 받고 계속 이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저희가 그분들의 기도와 헌신을 발판 삼아서 이렇게 잘 일어섰는데 이제는 저희가 일어나서 스스로 저희 단체를 이끌고 저희 도움이 필요한 고향 분들을 더 섬기고 도와드려야겠다, 그런 마음에서 제게 이사를 제의하셨을 때 그냥 헌신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섬기는 마음으로 나서게 됐습니다. 거창하게 이사 이런 직책보다는 그냥 심부름꾼 이렇게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기자) 그만큼 미국 내 탈북민 사회도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의미일까요?
데보라 최) 당연하죠. 이제는 많은 세월이 흘렀고 여기서 또 다들 열심히 잘 사셔서 성공하신 분들도 많아요. 다 자아를 찾고 다 자립하고 성공해서 사회에 능력 있는 일원으로 살아가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더 힘을 모아서 북한의 실태를 더 알리고 북한에서 먼저 나온 사람들로써 먼저 온 통일, 그래서 우리 탈북민들을 잘 챙기고 서로 협력해서 통일을 이뤄나가야 하겠다는 그런 마음들을 다 서로 다지고 있습니다.
기자) 단체 이사가 되셨는데, 미국 내 탈북민들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나요?
데보라 최) 저희가 지금까지 16년간 해왔던, 해마다 전 미주에서 우리 탈북민들이 모여서 수양회를 하거든요. 다 부모 친척도 없고 고향도 못 가고 하니까 1년에 한 번씩 서로 만나서 서로 위로하고 소통하는 귀한 모임이죠. 그 모임이 계속 이어지도록 노력할 거고요. 그 외에 탈북 자녀들이 교육을 잘 받아서 다시 북한의 재건에 잘 쓰임 받도록 하는 장학금 사업에 집중할 것 같아요. 또 미국에 사는 우리 탈북민들 중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많거든요. 몸이 아파서 일을 못 하시거나 언어가 힘들어 어려움이 있는 분들을 찾아서 도와드리는 그런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기자) 개인적으로 해산물 사업에 이어 부동산 사업을 하면서 주위 탈북민들을 재정적으로 돕고 탈북민 구출 단체에도 과거 1만 달러를 지원하는 등 꾸준히 기부 활동을 하시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데보라 최) 그게 북한 정권이 말하는 ‘승냥이 미국놈’, 미국 사람들의 문화입니다. 제가 여기서 오랫동안 살다 보니까 미국인들의 이런 기부와 도움,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도 없었어요.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분들이 조금이나마 도움의 손길을 주시고, 돈도 그렇지만 그 마음이 너무나도 위로가 됐거든요. 그래서 제가 받은 것만큼 진짜 저도 도와드려서 그분들에게 소망을 드려야겠다. 이웃을 돕고 주변을 살피고 섬기고 배려하는 그 문화 때문에 제가 여태까지 이렇게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제가 많이 받았던 것을 다시 어려운 사람들한테 이렇게 흘러가게 만드는 그런 마음이 자리 잡혀서 되게 기쁜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 그게 정말 보람이 있어요. 제가 해보니까 내가 가져서 다 취하는 것보다 남을 돕고 서로 위로가 되는 것이 정말 행복하고 그게 성공한 것보다 더 성취감과 행복감을 줍니다. 아, 그래서 미국분들이 이렇게 기부하며 사시는구나, 이렇게 느끼게 됐고 그래서 저도 그것을 본받아서 하게 됐습니다.
기자) 하지만 낯선 이국땅에서 정착하는 게 탈북민들에겐 녹록하지 않을 텐데요.
데보라 최) 네 당연히 쉽지 않죠. 언어도 안 통하고 다 모든 것이 생소하고. 또 미국이란 나라가 경제 대국이지만 저희는 북한에서 진짜 미국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만 배웠고 그랬었는데 미국에 들어와서 생활하는 순간 그게 다 깨집니다.
기자) 어떤 것이 깨지나요?
데보라 최) 미국 사람들이 대개 젠틀하고 여성들을 배려해 주고 아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배려해 주고. 그리고 제일 간단하게는 저희가 공공장소에 가면 그분들이 저희를 깍듯이 대해서 문부터 열어주고. 이런 모습에서 저희가 북한에서 미 제국주의 승냥이들이라고 배웠던 그런 악마들이 아니구나. 이런 인상을 받고 거기서 감동하게 되고. 인권과 존중과 배려를 중시하는 이 나라의 그 문화에 감동하게 됩니다. 이러면서 저희가 받았던 세뇌 교육은 그 자리에서 깨지게 되거든요. 물론 여기서 진짜 아무도 가족도 없고 가지고 온 것도 없는데 발을 붙이고 산다는 게 쉽지 않죠.
하지만 열심히 버티면서 이겨나가려고 꾸준하게 노력하니까 언젠가부터 저희 입에서 영어가 터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일자리 기회도 얻게 되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일해 나가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되게 잘 살 수 있게 되더라고요. 또 스스로가 잘 노력하고 다 제가 이룬 것은 다 저희가 취할 수 있고. 북한처럼 정권이 뺏어가지 않고. 아직도 미국은 진짜 기회의 나라, 기회의 땅, 아메리칸드림이 아직도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기자) 데보라 씨에게 미국은 어떤 존재인가요?
데보라 최) 미국이란 제2의 고향. 그리고 진정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곳. 제가 저답게 진짜 살 수 있는 곳.
기자) 미국 정착에 관심이 있는 북한 주민들이나 제3국에 있는 탈북민들에게 선배로서 어떤 조언을 하고 싶은가요?
데보라 최) 아메리칸드림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와서 다 열심히 노력하고 진짜 고난을 극복하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이렇게 살아갈 자신이 있으면 진짜 여러분들에게 그 기회는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대신 요행수나 거짓말 이런 것은 바라지 말아야 해요. 진실한 마음으로 진짜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기도하면서 담대하게 나아가다 보면 그 기회가 여러분들에게도 꼭 올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기자) 미국에서 결혼해 두 자녀를 낳고 첫째는 중학교에 다닌다고 들었습니다. 북한의 부모들은 자녀 교육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미국의 교육 상황을 북한의 부모들에게 어떻게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데보라 최) 당연히 미국은 선진국가라서 교육도 많이 발전했죠. 특히 틀에 박힌 그냥 다 짜여져 있는 그런 프로그램을 하는 것보다는 아이들의 창의력을 높여주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교육 프로그램이 매우 인상적이죠. 아이들의 수준에 맞춰서 그 재능을 다 각자의 모양대로 다 이렇게 발전시켜 주는 그런 교육이고요. 다만 잘못된 문화도 많이 성행합니다. 너무 자유주의적이고 마약에 관한 그런 심각한 문제들도 있죠. 그래서 미리 자녀들에게 잘 주의를 시켜야 해요.
기자) 개인의 창의력을 중시하는 게 인상적이란 얘기군요.
데보라 최) 네, 그래서 그냥 기계 기계처럼 그냥 국가가 시키는 대로 그냥 틀에 매여서 하기 때문에 진짜 발전을 못 하는 우리 북한의 세대들을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고요. 북한의 그 미래가 너무나도 걱정되고 그래서 하루빨리 북한이 마음을 열고 우리 새 세대를 창의적인 사람들로 자유와 선진을 추구하는, 그렇게 잘 교육을 시켰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기자) 해산물 가게로 나름 성공하셨는데, 지난해부터 미국에 정착한 탈북 난민 가운데 처음으로 부동산업에도 진출했습니다.
데보라 최) 제가 다른 해산물 상점을 하는 과정에서 저의 집을 사게 됐어요. 그 과정에서 제가 정말 흥미를 느꼈어요. 집을 찾아가면서 내 집을 마련하고 그 절차를 밟고 마지막에 집 열쇠까지 받는 그 순간이 정말 즐거웠거든요. 제가 다 관리하면서 너무 제가 잘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공부하고 쫓아가다 보니까 그것을 제가 하게 되더라고요. 정말 재미있고요. 일단 나가서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대화하고 그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도와주고 이런 과정에서 비즈니스까지 이루어지면 더 좋고. 적성에 너무나도 맞고 정말 재미있게 잘하고 있습니다.
기자) 북한은 공개적으론 모든 부동산이 국가 소유라 매매가 불법이지만 몇 년 전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아파트 매매가 성행한다고 들었습니다. 북한의 부동산 관계자들이 들으면 꽤 흥미를 느끼실 수 있겠습니다.
데보라 최) 제가 이 부동산을 하게 된 계기도 여기 미국 땅에 살면서 무슨 일을 하든지 이 시스템을, 좋은 것들을 어떻게 나중에 통일된 북한에 가서 적용할 수 있을까? 어떻게 북한 경제를 한국처럼 살릴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많이 하거든요. 그래서 이런 부동산업에서 일을 하면서 내가 어떻게 나중에 북한 가서 이것을 적용해 우리 북한 경제를 다시 끌어올릴 수 있을지 그런 것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가지를 배워도 되게 세심하게 나중에 써먹어야 되니까 열심해 배우고 있고요. 북한 사람들도 그게 되게 로망이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자기 집 마련에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어요.
기자) 추석입니다. 고향을 떠난 실향민들 입장에선 명절이면 고향 생각이 더 간절하다고 합니다.
데보라 최) 그렇죠. 미국에서 살면서 바쁜 일상으로 고향 친지들을 생각할 시간은 별로 없거든요. 아니 생각하면 뭐 해요 만나지도 못하고 더 마음만 힘든데. 그래서 생각 안 하려고 노력하는데 추석이 되면 제 의사와는 다르게 확 안겨 오는 것 같아요. 그리움이. 그래서 너무나도 슬프고 씁쓸하고. 옛날에 우리 고향 분들이랑 같이 산소 다니면서 정말 어려운 나날들이었는데 추석만큼은 되게 행복하거든요. 같이 다시 모여서 함께 추석을 쇨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소망하고 정말 만감이 교차합니다.
기자) 가족 생각도 간절하시겠습니다.
데보라 최) 지금 제가 그곳을 떠난 지 20년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제가 떠나올 때랑 20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진 게 하나도 없거든요. 그만큼 변화가 별로 없고 그만큼 거기 사는 주민들의 고통은 더해만 가고. 먹는 것으로 주민들을 꽉 틀어잡고 조정하는 김정은 정권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마음이 불편해요. 그럴수록 더 안에서부터 변화가 조금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그 노력이 모여서 더 큰 변화를 가져오리란 그런 희망도 있으니까. 좀 더 깨어지려고 노력하셨으면 좋겠어요.
남북한의 명절인 추석을 맞아 미국 내 탈북 난민 1호인 데보라 최 씨로부터 미국 생활과 탈북민 지원 활동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인터뷰에 김영권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