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A 뉴스] 미국 내 한인 ‘이산의 아픔’…눈 감을 때까지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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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벌어졌던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고, 휴전 협정 이후 한반도가 갈라지면서 이산가족들은 70년 넘는 생이별의 아픔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과 북한의 이산가족들은 몇차례 대면 상봉과 화상 상봉을 했지만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들은 그런 기회조차 갖기 어렵습니다. VOA는 한인 이산가족들의 아픔과 미국 의회의 입법 활동 등을 조명하는 특별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첫 순서로 1세대 한인 이산가족들의 이야기를 김영권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영상편집: 김정규)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벌어졌던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고, 휴전 협정 이후 한반도가 갈라지면서 이산가족들은 70년 넘는 생이별의 아픔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과 북한의 이산가족들은 몇차례 대면 상봉과 화상 상봉을 했지만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들은 그런 기회조차 갖기 어렵습니다. VOA는 한인 이산가족들의 아픔과 미국 의회의 입법 활동 등을 조명하는 특별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첫 순서로 1세대 한인 이산가족들의 이야기를 김영권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미국 북버지니아의 한 시니어센터에서 올해 87살의 전선복 할머니가 중장년들에게 키보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함흥 출신인 전 할머니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10만 명의 피난민을 구출한 흥남 철수작전 때 가족들과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랐지만, 결혼해 평양에 살던 큰언니와 인민군에 끌려간 오빠는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전선복 / 함경남도 함흥 출신
“그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죠. 오빠가 외아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제 어머니는 매일 부둣가에 나가서 매일 피난민이 쏟아져 오니까 혹시 거기 아들이 거기 섞여 있나? 그냥 아들만 생각하고.”

언니와 오빠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직도 소식을 알 수 없습니다.

미국 정착 후 북한의 가족을 찾을 수 있으니 착수금을 보내라는 한 단체의 말만 믿고 어렵게 돈을 건넸지만 그게 다 였습니다.

전선복 / 함경남도 함흥 출신
“안타깝죠. 안타깝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잖아요. 마음으로는 안타깝지만 할 수 없는 일이고. 아무튼 뭐 저부터도 그렇고 제 주변에 있는 그런 분들 이제는 거의 체념하는 것 같아요.”

버지니아주 폴스처치에 사는 평북 태천 출신의 89살 이승엽 할아버지는 1971년 미국 정착 후 민간 단체를 통해 두 차례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15살 나이 1.4 후퇴 때 헤어졌던 어머니를 30년 넘어 마흔 일곱 나이 미국 시민 자격으로 다시 만난 것입니다.

이승엽 / 평안북도 태천 출신
“그냥 뭐 목석이죠. 목석! 그냥 뭐 물론 인간이니까 이제 뭐 말도 표현을 할 수가 없지만 뭐 아무 말도 없고 그냥 모든 표정도 굳어있고.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거죠. 저 역시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수십 년만의 고향 방문은 북한 당국자들과 중개인들의 집요한 금전 요구로 북한 내 가족들을 너무 힘들게했습니다.

첫 방북 5년 뒤인 1987년 어머니가 병환으로 오래 살 수 없다는 편지를 받고 어쩔 수 없이 다시 북한으로 들어간 할아버지에게 북한 관계자는 트럭을 기증해야 한다고 다시 압박했습니다.

이승엽 / 평안북도 태천 출신
“동무가 (동생이) 그동안에 여기 지역구에서 상당히 공도 많고 이랬는데, 이번에 노동당 당원 추천을 받았는데, 조금 미달이 돼가지고는 아쉽게도 떨어졌는데 형님이 도와줘야 됩니다. 딱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벌써 딱 알았죠. 그러니까 그걸 뭐 하나의 나라라고 볼 수 없는 거죠. 깡패집단이죠. 이건 일종의 어떻게 그걸 그 인질로 삼아서 그걸 돈으로…”

이승엽 할아버지는 큰 돈을 마련할 여력이 없었고, 이후 몇 년간 동생과 편지를 주고받다가 소식이 끊겼습니다.

올해 97살의 대동군 출신의 진기찬 할아버지도 북한 당국의 이런 횡포를 겪었습니다.

북한 당국자들이 동생을 앉혀 놓고 미국으로 수신자 부담 전화를 걸어와 계좌 번호를 불러주며 큰 돈을 요구한 것입니다.

진 할아버지는 자신이 직접 중개인을 접촉하면서 곡절 끝에 두 동생을 1997년 중국 연길로 불러 내 47년여 만에 상봉했습니다.

진기찬 /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
“보고 한참 우는 거이지. 오래간만에 만나게 되면 말할 것도 없어. 말도 안 나와 고저 얼굴만 보고 좀 웃는 거이지 뭐. 또 실컷 울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진 할아버지는 이후 북한 당국자가 아닌 중개인들을 통해 동생들에게 생활비를 보내고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이후 동생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연락이 모두 끊겼습니다.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은 지난 2001년 기준으로 최대 10만 명인 것으로 추산됐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고령인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제는 그 규모가 크게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국 의회는 2001년 이후 여러 결의안과 법안을 통해 미주 한인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추진했지만 별다는 진전이 없었습니다.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주의 사안으로 보는 미국과 이를 정치적 압박과 양보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북한의 입장차가 컸기 때문입니다.

줄리 터너 / 미국 국무부 북한인권특사
“이런 상봉을 가능하게 하는 데 또 다른 큰 장애물은 북한과 다시 대화 테이블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 이 인도주의적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소통의 채널을 여는 것입니다.”

터너 특사는 그러면서 이산가족 상봉은 본질적으로 인도주의적인 문제라면서 영향을 받은 많은 분들의 나이를 고려할 때 너무 늦기 전에 진전시킬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