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노시창입니다.
이번 주에도 지난주에 이어 텍사스를 미국 영토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운 샘 휴스턴에 대해 전해드리겠습니다.
텍사스 주의 여러 장교들은 소규모 군대를 조직해 휴스턴의 허락 없이 멕시코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이들 장교들은 병사들에게 멕시코에 가면 얼마든지 부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휴스턴은 멕시코 공격은 잘못된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사령관직을 물러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전 텍사스 인들에게 오랜 스페인 기지 알라모를 파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는 강력한 멕시코 군대를 알라모 기지로는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836년 텍사스 대표들은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의가 열리기 며칠 전 산 안토니오로부터 멧시지기 한통 전달됐습니다. 산타 아나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멕시코 군대가 알라모에 있던 미국인 약 180명을 공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을 파괴하라는 휴스턴의 명령은 시행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텍사스 군인들은 사방에 흩어져 있었고, 아무도 알라모를 구하러 갈 수가 없었습니다.
텍사스 대표들은 멕시코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독립선언은 3월 2일 서명됐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 샘 휴스턴은 텍사스 공화국의 군 사령관으로 선출됐습니다.
휴스턴은 취임 직후 샌 안토니오로 갈 것을 서둘렀습니다. 그리고 불과 이틀 사이 병력을 5백 명으로 늘렸습니다. 그러나 알라모를 돕기 위한 군대는 너무 늦게 도착했습니다. 샌타 아나 군은 기지를 점령하고 그곳에 있는 텍사스 전사를 모두 살해했습니다.
멕시코 지도자는 그들의 죽음에 대해, 자신에 반대하는 모든 텍사스 인들에 대한 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텍사스인들은 머지않아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습니다. 샌타 아나 군대는 골리아드라는 곳에서 300명 이상의 텍사스 병사들을 체포했습니다. 병사들은 항복하면 전쟁포로로 처리해 미국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주겠다는 멕시코 군의 말을 듣고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자유는 주어지지 않았고, 결국 모두 교외로 끌려가 총살당했습니다.
휴스턴의 부대는 점점 더 커졌습니다. 그러나 전쟁 훈련을 받은 사람은 적었습니다. 휴스턴의 유일한 희망은 이들을 철수시켜 훈련하고 장비를 갖추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휴스턴 군대는 샌타 아나 군대에 앞서 동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샌타 아나의 천 200명 부대는 샌 재신토 강 부근 평평한 초원에 캠프를 쳤습니다. 1836년 4월 21일 휴스턴 군은 장차 텍사스가 되는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텍사스 군대는 초원의 북쪽 끝을 걸쳐 긴 종대를 이루어 포진했습니다. 그런 다음 멕시코 군 캠프로 접근해 갔습니다. 휴스턴이 지휘하는 텍사스 군은 멕시코 방어선에서 불과 몇 미터밖에 안 되는 곳까지 접근한 다음 사격을 가했습니다. 이들은 “알라모를 기억하라”라고 소리치며 공격을 가했습니다.
샌 재신토 전투는 불과 20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멕시코 군의 완전 참패였습니다. 텍사사스 군은 6명 사망, 부상 24명에 불과했습니다. 샘 휴스턴도 부상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텍사스 군은 수백 명의 멕시코 군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샌타 아나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휴스턴은 텍사스인들에게 샌타 아나를 찾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만약 이 멕시코 지도자가 대피했다면 그는 분명 다시 군대를 이끌고 텍사스를 공격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다음 날 일단의 텍사스 군인들이 왜소하고 슬픈 얼굴을 한 멕시코 군 한 명을 발견했습니다. 텍사스 군은 그를 그냥 돌려보낼 뻔했습니다. 그들이 이 사람을 멕시코 군 포로들 있는 데로 데리고 가자 멕시코 군인들은 일제히 “엘 프레시덴테”라고 외쳐댔습니다. 그가 바로 샌타 아나였던 것입니다.
휴스턴의 여러 장병들은 그를 죽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휴스턴은 그가 살아있을 때 더 이용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샌타 아나에게 텍사스 독립을 승인하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뒤 샌타 아나는 멕시코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휴스턴은 영웅이 됐습니다. 텍사스 주의 도시 휴스턴은 바로 그의 이름을 딴 것이었습니다.
신생 독립국이 된 론 스타 공화국, 즉 하나의 별이라는 Lone Star Republic이 됐습니다. 텍사스는 1836년 샘 휴스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했습니다. 휴스턴은 즉각 정부를 구성하고 각료들을 임명했습니다. 법원도 구성하고 우편 서비스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특히 정부 운영 자금이 부족했습니다. 군대 문제도 어려웠습니다. 군인들은 보수나 급식에 불만이었습니다. 일부는 신생국을 전복하고 멕시코를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휴스턴은 군인들을 직접 방문했습니다. 그는 군인들에게 텍사스에 해가 되는 일은 어떤 짓도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군인들은 그의 말에 순응했습니다. 텍사스 의회는 백만 달러 차관법안을 승인했습니다. 그러나 휴스턴은 그 액수의 반이면 족하다며 법안을 거부했습니다. 텍사스 공화국 대통령 재임 2년 후 휴스턴은 국경 안전을 이룩하고 재정제도를 정착시켰으며, 미국 정부로부터 텍사스 공화국의 승인을 얻어냈습니다.
휴스턴은 텍사스를 미국의 일부로 편입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북부의 주들은 텍사스를 하나의 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주 요인은 노예제에 대한 남북간의 이견이었습니다. 텍사스가 주로 편입되면 노예 인정 주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결과가 될수 있었습니다.
1840년, 휴스턴은 마가렛 리아 (Margaret Lea)와 결혼했습니다. 이들 사이에서는 모두 8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1841년 텍사스는 휴스턴을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이때 텍사스 정부는 극심한 부채를 안고 있었습니다. 휴스턴 대통령은 텍사스 해군에게 멕시코로부터 돌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지폐를 발행해 그 가치를 높게 유지했습니다. 이런 때 멕시코 군이 다시 텍사스로 들어왔습니다. 휴스턴은 텍사스 군을 보내 그들을 막게 했습니다. 침입자들은 다시 물러났습니다. 그후 몇년 동안 텍사스와 멕시코의 분쟁은 계속됐습니다.
1844년 미국에서는 제임스 폴크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미국 의회는 텍사스 합병을 위한 결의안을 심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차례의 진지한 토론이 있은 다음 텍사스 영입안은 통과되고 정식 법으로 채택됐습니다. 이로써 텍사스는 1845년 12월 29일, 미국의 제 28번째 주가 됐습니다. 샘 휴스턴은 텍사스 주의 첫 상원의원의 한 사람으로 워싱턴으로 갔습니다. 그후 13년 동안 휴스턴은 텍사스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으로 활약했습니다.
이 때는 미국에도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노예 문제는 의회에서 격렬한 논쟁거리였습니다. 북부에서는 새로 영입된 주들이 노예제를 인정하지 말것을 요구했습니다. 남부에서는 노예제가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850년 켄터키 주의 헨리 클레이 상원의원이 이 갈등을 해소하는 안을 들고 나왔습니다. 클레이 의원은 남과 북의 주들이 국가가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양측의 차이점을 해소하는 타협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의 안은 승인이 됐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 후 일리노이주의 스티븐 더글라스 상원의원이 새로 등장한 서부의 주들은 노예제 찬반을 각각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1859년 텍사스 주민들은 샘 휴스턴을 주 지사로 선출했습니다. 이때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가 남부의 연방 탈퇴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열자고 제안했습니다. 텍사스 주민들은 많은 수가 연방 탈퇴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휴스턴은 그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1861년 에이브래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많은 텍사스 인들은 여전히 연방 탈퇴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휴스턴은 이들에게 링컨이 어떤 지도자인지 좀 더 두고 보자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기다릴 수 없다, 텍사스 주도 장래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하자고 서둘렀습니다.
그러나 그 회의가 열리기 전 사우스 캐롤라이나와 5개 남부 주들이 연방탈퇴를 선언했습니다. 자신도 노예를 소유하고 있던 휴스턴은 그러나 거듭 텍사스인들에게 탈퇴를 하지 말고 합중국의 일원으로 남아 있자고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모임을 강행한 대표들은 표결을 거쳐 텍사스의 연방 탈퇴에 찬성하고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남부 연맹 합류를 결정했습니다. 휴스턴은 이 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샘 휴스턴은 자신이 텍사스를 너무나 사랑하며 이곳이 내전에 휩쓸려 피비린내 나는 곳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때문에 휴스턴은 주지사 직에서 해임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그의 공직 생활도 막을 내렸습니다. 휴스턴은 그 후 몇 년 동안 가족 및 친지들과 함께 지내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휴스턴은 미국이 남북전쟁이 유혈사태로 시달리던 1863년 7월 26일, 숨을 거두었습니다.
인물 아메리카 이상으로 샘 휴스턴 1, 2편을 모두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