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인 100년의 발자취] 김형제 상회 II - 과수업으로 성공해 한인 사회에 큰 기여

한인 이민사를 연구하시는 김지수 씨를 모시고 100년이 넘는 한인들의 미주 이민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1920년에 과수 농장과 묘목판매, 과일포장 수송 사업체로 크게 성공을 거둔 김형제상회의 설립자 김형순과 한덕세, 그리고 김호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김형순은 1886년 5월 4일 경남 충무출신으로 1901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3년 하와이 이민 첫 배의 통역으로 왔다가 1906년 본토로 이주해 LA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09년 귀국했습니다. 그후 한일합방이 되자 상해로 망명하였다가 유학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신도유학생으로 다시 도미해서 1916년부터 Reedley에서 부인과 동업으로 과일 농장을 시작했습니다.

"김형순은 영어에 능통해서 회사경영에 크게 기여한 반면에 동업자인 김호는 주로 독립운동에 참여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김형순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 신한민보 발행인을 역임했고 김호와 같이 장학재단인 Korea Foundation을 설립했는가하면 현 LA한인회관의 전신인 Korean Community Center와 현 LA한인회의 전신인 LA거류민회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한 공로로 1970년에 한국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습니다."

김형순의 부인 한덕세는 1894년생으로 이화학당 음악과 출신으로서 남편과 동업으로 농장을 경영하다가 이화학당 시절의 스승인 김호가 독립자금 모금책으로 미주를 순회할 때 만나서 1920년부터 김형순, 김호 그리고 한덕세가 동업으로 김형제상회를 경영하게 된 것입니다.

김호는 1884년 5월 서울에서 김정진으로 태어나서 1904년에 한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배재학당, 이화학당 그리고 도산 안창호가 세운 평양의 대성학교에서 수학 선생으로 후학을 양성하다가 대성학교가 일장기 불 계양 운동을 한 것이 빌미가 되어 이 학교가 1912년에 일제에 의하여 폐교되자 일경을 피하여 이름을 김호로 바꾸고 상해로 망명하였다가 1914년 신도학생으로 도미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본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상항의 대한인국민회가 회동하여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기로 결의하고 총회장 안창호를 상해에 세워지는 임시정부에 국민회 대표로 파견하고 김호를 미주지역 독립운동 자금 모금책으로 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이에 따라 김호는 미 전국의 한인들을 방문하여 3.1운동 소식을 전하며 독립자금을 모금했는데 당시 김호가 60일 간에 모금한 액수는 $10,000에 달하였으며 1919년 한해 만도 하와이와 본토에서 모금된 총액은 $88,013에 달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김호에 관한 얘기가 계속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