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언론인 대담] '보그' 전 수석 편집장, 레슬리 시모어

Your browser doesn’t support HTML5

언론 자유와 양성평등, 두 가지 영역에서 동시에 노력하는 여성 언론인들을 만나보는 ‘여성 언론인 대담’ 시간입니다. 미국에서는 수많은 잡지가 발간됩니다. 그중에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게 옷차림(패션)과 유행, 생활 기사 등을 주로 다루는 여성지들인데요. 유행의 일선에서 선 여성지 기자들에 관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라는 제목으로 소설이 나오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이 영화의 본보기가 된 실제 인물 중의 한 명이 오늘 대담의 주인공인데요. 미국 최고 여성지 ‘보그(Vogue)’ 수석 편집장과 국제적인 여성 매체 ‘마리 클레어(Marie Claire)’ 편집국장을 지낸 레슬리 시모어 기자와 함께합니다.

레슬리 시모어 전 ‘보그(Vogue)’ 수석편집장.

기자) 안녕하세요, 바쁘신 중에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일 먼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이거 진짜 실화인가요?

시모어) 하하하하, 네. 그런데 제가 주인공은 아니고요, 제가 ‘보그’에서 모시던 상사의 이야기가 중심이에요. 당사자인 편집국장이 계셨고, 저는 수석 편집장이었죠. 당시 저희가 매일 잡지를 만들면서 일어났던 일들이 소설과 영화의 모티브(중심 소재)가 된 겁니다.

기자) VOA 한국어 방송 청취자들께 자기소개를 해주시죠.

시모어) 저는 레슬리 시모어입니다. ‘카비클럽 닷컴(coveyclub.com)’의 창립자이고요, 앞서 패션 잡지와 여성 매체에서 오랫동안 활동했습니다. 지금 맡고 있는 카비클럽 운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데요. 물론, 아직도 다양한 언론 매체에 여성 문제에 관해 기고하고 있습니다. 또 여성계 현안이 있을 때마다, 방송 토론자나 진행자로 나서기도 하고요, 강연도 합니다.

기자) 카비클럽이 뭐 하는 곳입니까?

시모어) 40세 이상 여성들의 자립과 사회 적응을 돕는 모임이에요.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여성이 약자잖아요. 그런데, 그중에서 젊은 사람들은 그래도 사정이 좀 나아요. 중년 여성들이 더 약자가 되거든요. 결혼하고 나서 육아다, 가사 일이다, 남편 뒷바라지 다 해놓고 보면, 사회에서 점점 소외되고 분리됩니다.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나면, 전에 배운 지식과 기술도 다 잊어먹게 되고 건강도 예전 같지 않은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면 ‘내가 그동안 뭐 했나’라는 생각이 들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죠. ‘엄마’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나면, 중년 여성들은 빈 그릇이 되는 겁니다.

기자) 말하자면, ‘경력 단절’ 여성들의 취업을 돕고 계신 겁니까?

시모어) 음, 경력을 재정립(reinventing)하는 걸 돕습니다. 또한, 인생 자체를 재정립하도록 지원하는데요. 삶을 통째로 바꾸는 기회를 제공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취업과 기술 개발, 심리 상담도 하고요. 같은 처지의 여성들끼리 모여서 그냥 수다 떨면서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는 공간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온천 여행도 함께 떠나고요. 하지만 요즘은 코로나 사태 때문에 외부 활동은 못 하고 있는데요. 인터넷을 이용한 원격 강연회(webinar)를 주 5회 무료로 열고 있고요. 저희 웹사이트에 올린 각종 자료도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기자) 모임 참가 기준이 왜 하필 40세입니까?

시모어) 40세가 되면 무슨 일이든 큰 게 일어나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인생의 변곡점이 꼭 찾아오는 겁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이 변곡점을 감당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워요. 결혼과 출산 등을 거쳐도, 사실 본인 생활에 크게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요. 중년이 되면 남자들은 오히려, 경험과 경력이 쌓였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더 좋은 대우를 받잖아요.

기자) 중년이 됐을 때, 남성과 여성을 대하는 미국 사회의 태도가 다르다는 말씀입니까?

시모어) 그렇죠. 남자한테 흰머리가 나기 시작하면, ‘오! 저 사람은 경험이 많겠구나’ 하고 해당 분야에서 높이 받들어줍니다. 하지만 여성들은 달라요. ‘젊음과 성적인 매력’을 여성 최고 덕목으로 꼽으니까요. 중년이 되면 가족들을 위해 포기한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냥 ‘나이 든 여자’로 취급받는 경우가 대다수에요. 이런 현실을 중년 여성들이 어떻게 극복하고, 자기 삶을 다시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을지 정보를 전하고 교육하는 게 요즘 제 활동의 중심입니다.

기자) 여성지 편집장으로서 화려한 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실 줄 알았는데, 시작부터 계속 무거운 이야기네요.

시모어) 제가 ‘보그’에서 일할 때나, 그 뒤로도 유명 여성지의 편집 책임을 맡으면서, 가장 많이 받은 독자 요청이 있어요. 젊은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옷차림이나 유행에 관한 정보를 전해주는 것도 좋지만, 중년 여성들을 도와달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때마침 2000년대 이후 여성지를 비롯한 인쇄 매체 산업이 하향세에 들기도 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인생의 방향을 틀기로 했고요. 2018년에 만든 ‘카비클럽’이 저한테 새로운 지향점이 된 겁니다.

기자) 그럼 기자 생활을 시작하실 때, 다양한 매체 중에서 여성지를 선택하신 이유가 뭡니까?

시모어) 바로 ‘양성평등’ 때문이에요. 여성들은 우리 사회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였으니까요.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조직화’되고 ‘고착화’돼왔잖아요. 그런데도 대부분의 언론 매체는 남성들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보도해요. 여성들의 관심사,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주는 매체는 사실상 여성잡지뿐이에요. 기자로서 여성지를 활동지로 선택한 것은 어렵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기자)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조직화’되고 ‘고착화’된 이유가 뭘까요?

시모어) 여성들은 태어날 때부터 차별에 직면해요. 미국뿐 아니라 세계 어디서나 ‘이류 인간’으로 양육됩니다. 여자아이한텐 보통 ‘너는 착해야 돼’, ‘예뻐야 돼’, ‘너무 열심히 하지 마’, ‘너무 궁금해할 필요 없어’, 항상 이러잖아요. 남자아이는 그렇게 키우지 않는데 말이죠.

기자) 전통적인 양육 방법 때문에 성차별이 ‘조직화’됐다는 말씀이신데, ‘고착화’된 것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시모어) 똑같이 사회에 진출해서, 같은 일을 해도 여성은 평균 20% 정도 급여를 남성보다 덜 받아요. 이런 통계는 어렵게 찾지 않아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나마 상황이 낫다는 미국의 사정이 이런데, 다른 나라는 어떻겠어요. 더 하겠죠. 그런데 보세요, 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길어요. 더 낮은 대우를 받는 인구의 절반이 다른 절반보다 더 오래 사는 이 괴리를 어떻게 해결할 건지,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됩니다.

기자) 그런 고민을 이야기하자면, 대담 시간이 모자랄 것 같습니다. 가벼운 화제로 돌려보죠. 기자 생활하면서 가장 좋았던 기억은 뭡니까?

시모어) 체르노빌에 사는 노숙자 여성을 취재한 적이 있어요. 체르노빌은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방사능이 유출돼 ‘죽음의 땅’이 된 곳이잖아요. 모든 사람이 떠나야 마땅한 데, 거기 사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구소련ㆍ현 우크라이나) 당국의 통제가 미치지 못했던 거죠. 다른 곳에 마땅한 정착지를 마련해주지도 않으니까, 가족과 삶의 터전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상당수가 거기서 할 수 없이 머물고 있는 거예요. 집이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노숙자라면 얼마나 더 충격적인 상황입니까? 그들의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잡지에 실었는데,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얻었어요.

레슬리 시모어 전 편집장이 미셸 오바마 여사를 인터뷰했다.

기자) 제가 알기론 미국 언론 역사상 유일하게, 현직 대통령 부인을 ‘1일 기자’로 채용해 일을 시키신 적이 있죠?

시모어) 하하하, 맞아요. 그게 참 말도 안 되는 일이었는데요. 기자로 불러서 일을 시킨 건 아니고요. 명예 편집국장으로 모신 적이 있어요. 바락 오바마 대통령 재임 당시 미셸 여사였는데요. 백악관에 연락해서 “오셔서 우리 잡지 좀 만들어 주실래요”하고 물었어요.

기자) 미셸 오바마 여사가 곧바로 승낙한 겁니까?

시모어) 네. 놀랍게도 “그래요”, 바로 답하더라고요. 제가 미셸 여사를 세 번 표지 인물로 선정했었는데요. 대통령 부인이 되기 전에 처음 촬영했었어요. 그 자체로 관심받을 만한 인물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백악관에 들어간 뒤, 두 번 더 표지 인물로 선정했는데요. 그때마다 흔쾌히 응해줬어요. 그러다가 표지에만 나서지 말고, 아예 잡지 전체를 만드는 권한을 맡겨 보자고 생각했던 거죠.

기자) 미셸 오바마 여사에게 잡지를 만드는 권한을 준 이유는 뭡니까?

시모어) 아시다시피, 미셸 여사는 백악관에 있을 때 매우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외부 활동을 했어요. 전통적인 역대 미국 대통령 부인들의 모습과는 달랐죠. 그 답게, 잡지 안에 다양한 소재들을 녹아냈는데요. ‘건강한 식생활’ 같은 일상생활 주제에서부터, ‘여성의 시각에서 외교를 바라보는 법’ 같은 시사 현안까지 광범위한 주제들을 다뤘죠. 기사를 쓰기 위해, 미셸 여사가 캄보디아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제가 동행했고요. 그런 내용을 담은 당시 발행본의 인기가 굉장히 높았습니다.

기자) 아쉽지만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북한에서 VOA를 듣는 분들을 포함한 세계인들에게, ‘언론 자유’와 ‘양성평등’에 관해 어떤 말을 해주시겠습니까?

시모어)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어려움은 세계 모든 곳에 있어요. 특히 요즘 코로나 사태 때문에 피해가 더 큰 쪽이 여성들이에요. 우리 여성들이 연대하고 공조할 때, 함께 진전을 볼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미국 여성들은 그래도, 이런 일을 바꿔나갈 필요성에 눈을 뜬 상태예요. 그래서, 북한을 비롯해 상황이 더 나쁜 곳들에 우리가 손을 뻗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양성평등’의 진전을 보기 위해, 미국 여성들이 손을 뻗어서 세계와 연대해야 한다는 말씀인데, ‘언론 자유’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시모어) ‘우리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언론 자유 없는 곳의 주민들에게 드리고 싶어요. 지금 사는 곳에 언론 자유가 없다면, 미국 언론에 얘기해주는 것도 변화를 위한 좋은 방법이니까요. 저도 잡지사에 있으면서, 그런 곳에 사는 분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려고 노력했는데요, 북한 청취자들의 반응과 의견, 여론을 담아낼 수 있는 길이 앞으로 많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기자)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목표나 향후 계획이 있다면 어떤 겁니까?

시모어) 개인적인 목표는, 여성들이 최고의 삶을 살도록 계속해서 돕는 거예요. 그게 ‘카비클럽’을 세운 이유이기도 하고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세상의 오랜 관습들이 지금까지도 여성들의 삶을 규정하고 있어요. 여자라면 이래야 된다, 여자는 이래선 안 된다, 이런 잘못된 개념들이 여성들을 옥죄고 있는 거죠. 이걸 깨고 일어서도록 돕는 일에 제힘을 다할 겁니다. 그래서 ‘당신을 재정립하라(Reinvent Yourself)’라는 여성 대상 인터넷 방송도 하고 있어요.

기자)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계기가 되면, 오늘 못다 한 이야기 마저 해주시죠.

시모어) 그거 좋습니다. 오늘 좋은 이야기 나누게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또 연락할게요.

언론 자유와 양성평등, 두 가지 영역에서 동시에 노력하는 여성 언론인들을 만나보는 ‘여성 언론인 대담’, 오늘은 레슬리 시모어 전 ‘보그’ 수석 편집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지금까지 오종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