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배경과 관련 용어를 설명해드리는 ‘뉴스 따라잡기’ 시간입니다. 7월 1일로 중국 공산당이 창당한 지 100년이 됐습니다. 중국 지도부는 이번 주를 창당 100주년 경축 기간으로 정하고 연일 대규모 축하 행사와 공연 등을 펼치고 있는데요. 뉴스 따라잡기 이 시간에는 중국 공산당의 어제와 오늘을 짚어봅니다.
“100년을 맞은 중국 공산당”
중국 ‘공산당’의 공식 창당일은 1921년 7월 1일입니다. 하지만 실제 공산당이 출범한 날은 7월 23일입니다.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마오쩌둥을 비롯한 지역 대표들은 그해 7월 23일부터 7월 30일까지 상하이에서 제1차 전국대표대회(전당대회)를 개최했는데요. 당시 대회에 참석한 당원은 5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마오쩌둥은 후에 중국 공산당 창당일을 7월 1일로 정했는데요. 이후 지금까지 중국 공산당은 창당일을 7월 1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공산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이 창당될 무렵, 중국은 몹시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당시 중국은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반봉건주의, 반제국주의 시위가 확산하고, 지식인을 중심으로 공산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히 전파되고 있었는데요. 마오쩌둥도 베이징대학교 도서관 사서 보조로 일하면서 공산주의 이념을 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의 정당들”
오늘날, 중국에는 ‘공산당’ 외에 8개의 군소 정당이 있습니다.
‘중국민주동맹’, ‘중국민주건국회’, ‘중국치공당’, ‘타이완민주자치정부연맹’ 등인데요. 하지만 이들은 일종의 공산당 위성 정당들로, 중국은 사실상 공산당이 지배하는 일당 체제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실제로 중국 지도부도 8개 정당이 공산당의 영도를 받아 중국 특색 사회주의에 협력하고 있으며, 이들은 공산당의 좋은 참모이자 조수, 동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 현황”
100년 전, 불과 50여 명으로 시작된 중국 공산당은 2021년 현재 9천500만 명 넘는 당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 정당의 당원 수가 북한 전체 인구의 거의 4배, 남한 인구의 약 2배에 달한다는 건데요.
중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1997년 약 6천만 명이었던 당원 수는 2005년 7천만 명을 넘어섰고요. 2010년에는 8천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특히 시진핑 국가주석이 집권한 이래 매년 당원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작년에는 한 해 243만 명이 가입했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현재, 약 1억 8천만명의 당원을 보유하고 있는 인도국민당(BJP)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당원을 보유하고 있는 정당이고요. 구소련 붕괴 후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공산당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
“공산당 통치국가”
오늘날 중국은 공산당이 통치하는 일종의 ‘당 국가(party-state)’로서, 정당의 대표인 총서기가 국가원수인 국가주석직을 맡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 공산당은 최고의결기구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의회에 해당하는 전인대는 명목상 입법기구로서, 서방에서는 고무도장, 거수기 등으로 부르며 비판하는데요. 13기 전인대의 경우, 공산당이 전체 의석 2천980석 가운데 2천95석을 갖고 있습니다. 또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전인대 상무위원회도 통상 175석 가운데 3분의 2를 공산당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할 당시만 해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약 1조 3천억 달러로 미국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해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0조 6천억 달러에 육박했습니다.
하지만 2003년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취임하면서 중국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는데요. 이러한 발전 배경에는 중국의 WTO 가입이 큰 몫을 했다는 게 경제 전문가들의 평가입니다.
WTO 가입 전까지만 해도 미미했던 중국의 대외 수출은 이후 빠르게 확대됐고, 오늘날 중국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중국은 지난해 전 세계를 강타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여파 속에서도 주요 경제국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성장을 기록했는데요.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은 GDP 규모가 약 20조 9천300억 달러로 여전히 1위 자리를 유지했고요. 이어서 중국이 14조 7천억 달러로 2위를 차지했습니다.
“시진핑 집권과 중국의 현주소”
중국의 비약적인 경제 발전과는 달리 정치 분야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게 지배적인 평가입니다. 일각에서는 지난 2013년 시진핑 국가주석이 집권한 이래 오히려 후퇴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작지 않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특히 지난 2017년, 시진핑 주석의 집권 2기를 앞두고 당의 지도이념인 당장(당헌)을 개정했는데요. 더불어 이른바 ‘시진핑 사상’이라고 하는 시 주석의 정치사상을 명기하는 등 시 주석의 권력 집중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원래 국가주석직은 10년으로, 통상 전반 5년을 집권 1기, 후반 5년을 집권 2기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은 2018년 개헌을 통해 국가 주석직 연임 제한 문구를 삭제한 바 있습니다.
시진핑 주석은 애초 오는 2023년, 10년 임기를 마치고 주석직에서 물러나야 하는데요. 하지만 관련 문구가 삭제되면서 다음 번 통치도 가능한 상황입니다.
“두 개의 100년과 중국몽”
시진핑 주석은 2013년 취임 이래, 중국이 강대국으로 우뚝 선다는 이른바 ‘대국굴기’를 기치로 삼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 정부는 ‘두 개의 100년’을 집중적으로 홍보하고 있는데요. 하나는 공산당 창당 100년을 맞은 2021년까지는 의식주 걱정 없이 풍족한 삶을 누리는 ‘샤오캉’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꿈입니다. 시진핑 주석을 위시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아 중국은 샤오캉 사회를 달성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건설하겠다는 목표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달라진 위상과는 달리,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이미지는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서방 세계는 중국이 홍콩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등 홍콩의 자치권과 민주주의를 침해하고, 위구르족과 티베트족 등 소수 민족의 인권을 탄압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 남중국해와 동중국해 주변국과의 갈등, 타이완에 대한 무력 압박이 갈수록 거세지면서 적지 않은 마찰을 빚고 있습니다.
여기에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며 중국에 대한 압박을 늦추지 않는 모양새인데요. 창당 100년을 맞은 중국 공산당이 미국과의 관계를 비롯해 어떻게 국제 관계를 풀어갈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뉴스 속 인물: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
최근 뉴스의 화제 인물을 소개하는 ‘뉴스 속 인물’ 시간입니다. 오늘 주인공은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입니다.
신정국가인 이란에서 종신직인 ‘최고지도자’, 이란어로 ‘라흐바르’라는 위치는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보다 더 높은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갖는 국가 원수이자 최고의 권력자입니다. 이 때문에 최근 이란 대선에서 강경 이슬람 원리주의자 에브라힘 라이시 후보가 당선되면서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아야톨라’라는 말은 이름이 아니라 이슬람 시아파에서 고위 성직자들에게 붙이는 호칭입니다.
알리 하메네이는 1939년 이란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도시 중 하나인 ‘마슈하드’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의 후손인 그는 훗날 이란 초대 최고지도자가 되는 루홀라 호메이니를 비롯해 당시 저명한 시아파 학자들이 있던 ‘곰’시의 신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하메네이는 1963년부터 팔레비 왕조에 반대하는 시위에 가담하면서 여러 차례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또 호메이니의 최측근으로서 1979년 이란에서 발생한 이슬람 혁명을 주도했습니다.
혁명 후 그는 잠깐 이란혁명수비대 사령관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또 오늘날 미국과의 외교 단절 사태를 불러온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는 강경 매파로 미국과의 협상에 나섰습니다.
하메이니는 이란에 이슬람공화국이 수립된 이래 이란의 주요 정책에 깊이 관여해온 인물입니다.
또 이슬람근본주의를 기치로 내세운 ‘이슬람공화당(IRP)’의 창당 멤버기도 합니다.
1981년 당시 이란 대통령이 갑자기 암살되고, 같은 해 이슬람공화당 대표가 폭탄 테러로 사망하자, 그는 당 사무총장(대표)에 임명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해 당선됩니다.
하메이니는 1985년 재선에도 성공하는데요. 하지만 대통령 임기를 얼마 앞두고, 1989년 6월 3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사망하자, 이슬람 법학자들로 구성된 국가지도자운영회의 투표를 통해 차기 라흐바르로 선출됐고요. 오늘날까지 32년째 이란의 최고지도자로서 최고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메네이가 80을 넘긴 고령이다 보니 일각에서 차기 후계자감을 거론하기도 하는데요. 하메네이 사후 가장 유력한 후계자 후보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 당선인이 물망에 오르고 있습니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창당 100년을 맞은 중국 공산당의 어제와 오늘 짚어봤고요. 뉴스 속 인물로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에 대해 알아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