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따라잡기] 중국 톈안먼 사태 

중국 '톈안먼 민주화 시위' 32주년을 맞은 4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 주변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뉴스의 배경과 관련 용어를 설명해드리는 ‘뉴스 따라잡기’ 시간입니다. 6월 4일로 중국 톈안먼 민주화 시위가 32주년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예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중국 당국의 엄격한 통제로 중국에서는 잃어버린 역사가 되고 있는데요. 뉴스 따라잡기 이 시간에는 톈안먼 민주화 시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역사의 현장, 톈안먼 광장”

중국 수도 베이징에 있는 톈안먼 광장은 중국 민주화 시위의 현장이자 중국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입니다.

톈안먼 광장은 중국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자금성의 남쪽에 있는데요. 1400년 대 명나라때 처음 지어졌지만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광장의 모습이 갖춰진 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입니다.

톈안먼 광장은 면적이 약 44만㎡로 한꺼번에 60만 명 정도는 너끈히 수용할 수 있다고 하니 어느 정도 큰 광장인지 조금 가늠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곳에는 다른 나라의 국회의사당에 해당하는 인민대회당을 비롯해 중국 국가박물관, 인민영웅기념비, 마오쩌둥기념관 등이 들어서 있어 중국의 공산주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고요. 주요 국가 행사나 열병식 거행 장소로서, 중국 정치 무대의 핵심 공간으로 자리매김해왔습니다.

“톈안먼 시위의 발단”

1970~1980년대 중국은 거대한 격변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했는데요. 하지만 물가 급상승, 관료들의 부정부패, 실직난, 분배 불균형에 대한 불만 등이 겹치면서 사회적 불만이 누적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 전 공산당 총서기가 73세를 일기로 심장 질환으로 사망하는데요. 그의 사망은 톈안먼 사태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습니다.

후야오방 전 공산당 총서기는 개혁개방과 관료들의 부패 척결을 촉구하며 당내 개혁가로 통해왔는데요. 하지만 1986년 불거진 중국 대학생들의 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이유로 1987년 실각한 인물입니다.

그의 사망 소식에 전국 각지의 대학생, 농민, 노동자들이 톈안먼 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는데요. 이들은 후야오방 전 총서기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고, 개혁 정책의 속도를 높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광장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났고, 전국 주요 도시에서도 지지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대와 정부 대립”

이런 가운데 4월 22일,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장례식이 거행됐습니다.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장례식은 톈안먼 광장 서쪽에 있는 인민대회당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는데요.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당국은 시민들의 광장 진입을 막았고, 시위대는 이에 항의해 광장을 점거하고 중국 정부 지도부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연좌, 단식 농성에 들어가는데요.

하지만 중국 공산당 지도부와 중국 관영 매체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소수 세력의 선동이라고 폄훼했습니다.

사태가 장기화하자, 5월 19일,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후임인 자오쯔양 총서기가 톈안먼 광장을 찾는데요. 자오쯔양 총서기는 당 지도부가 너무 늦게 찾아왔다고 사과하며 단식 농성을 풀 것을 촉구했지만, 성과없이 현장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못돼 자오쯔양 총서기도 시위대 대응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실각했습니다.

“계엄령 선포와 유혈진압”

5월 20일, 중국 당국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워 수만 명의 병력을 베이징 교외에 집결시켰습니다. 하지만 베이징 시민들은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이들의 도심 진입을 막았습니다.

톈안먼 광장 주변의 긴장감도 고조되는데요. 조만간 인민해방군이 광장에 투입될 것이라는 소문도 돌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6월 3일,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무력 진압을 최종 승인합니다. 이날 밤, 인민해방군과 탱크 부대는 광장에 진입했고 시위대와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6월 4일 새벽 4시, 광장을 밝히고 있던 불이 갑자기 꺼지고 확성기에서 이제 광장 청소가 시작된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어 인민해방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하며 광장은 피의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피해 상황”

오늘날까지 중국 당국의 무력 진압으로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중국 당국이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인데요. 중국은 군인들을 포함해 200여 명이 사망하고, 7천여 명이 다쳤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위 참가자들의 증언과 당시 현장 사진과 영상, 외신 보도를 근거로 많게는 1만 명까지 목숨을 잃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빙 조짐을 보이던 중국과 서방 국가들의 관계는 다시 급격히 악화합니다.

미국과 프랑스 등 국제 사회는 사건 발생 후 중국의 비인도적 탄압을 규탄하며 제재를 단행했습니다.

“톈안먼 민주화 시위에 대한 인식 차”

톈안먼 시위에 대한 중국 정부의 시각은 국제 사회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서방 세계는 톈안먼 시위를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민중의 시위로 보는 반면, 중국은 극소수, 반공산주의 세력이 노동자와 선량한 시민들을 선동해 일으킨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탱크를 동원한 무력 진압도 사회 안정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톈안먼 시위에 대한 관련 보도는 물론 중국의 SNS나 인터넷 포털에서 관련 검색도 제대로 할 수 없는데요. 당연히 매년 6월 4일이 와도 톈안먼 시위를 기념하는 어떠한 행사도 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톈안먼 광장 주변 경계를 강화하며 엄격히 통제하고 있는데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중국의 청소년들은 32년 전 중국 톈안먼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고요. 중국에서 톈안먼 사태는 잃어버린 역사가 되고 있습니다.

반면 중화권 국가들과 미국, 유럽 등지에서는 톈안먼 사태의 역사적 진실을 촉구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매년 열리고 있는데요. 하지만 홍콩 당국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을 이유로 추모 촛불 집회를 불허하며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틴 워머스 미 육군장관


뉴스 속 인물: 크리스틴 워머스 신임 미 육군장관

최근 뉴스에서 화제가 된 인물을 소개하는 ‘뉴스 속 인물’ 시간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인공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육군장관이라는 이정표를 기록한 크리스틴 워머스 신임 미 육군장관입니다.

지난달 27일, 크리스틴 워머스 육군장관 지명자가 25대 미 육군장관에 취임했습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육군장관이라는 기록을 갖게 된 워머스 장관은 국방부와 백악관, 민간 전문 연구기관 등에서 일한 30년 가까운 경력의 국가 안보 전문가입니다.

워머스 장관은 1969년생으로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매사추세추주에 있는 윌리엄스칼리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요. 메릴랜드대학교에서 공공정책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졸업 후 대통령 인턴 프로그램으로 공직에 첫발을 디딘 그녀는 1996년부터 2002년까지 국방부 정책실에서 근무하며 안보 전문가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대통령 특별보좌관과 국방 담당 수석 담당관으로 활동합니다.

바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4년부터 2016년까지는 국방부 정책 담당 차관을 역임했고요. 이후 민간분야로 자리를 옮겨, 민간 정책연구기관인 랜드연구소에서 국제안보·방위정책 센터장도 지냈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 인수위원회에서는 국방 분야를 맡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4월, 조 바이든 대통령으로부터 육군장관 후보로 지명되는데요. 상원 인준 과정에서 워머스 장관은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으로부터도 고른 지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중국 톈안먼 사태 살펴봤고요. 뉴스 속 인물로 크리스틴 워머스 신임 미 육군장관에 대해 알아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