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의 전직 고위 외교 당국자가 평양주재 말레이시아대사관의 철수를 주장했습니다. 데니스 이그네이셔스 전 말레이시아 정부 차관은 3일 ‘VOA’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북한이 말레이시아를 경화 획득과 유엔 제재 회피의 근거지로 삼아 왔다며 애초부터 잘못된 관계였다고 말했습니다. 또 김정남 씨 피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불법 활동과 노동자 파견 등에 엄격한 제한 조치가 뒤따를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이그네이셔스 전 차관은 칠레, 아르헨티나, 캐나다 주재 대사 등을 역임했고, 동아시아 담당 수석 차관보, 유럽 담당 차관, 미주 담당 차관 등 고위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이그네이셔스 전 차관을 백성원 기자가 인터뷰 했습니다.
기자) 김정남 씨 피살 사건 이전까지 북한과 말레이시아 간 관계는 어땠습니까?
아그네이셔스 전 차관)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말레이시아는 평양에 2003년 대사관을 개설했고, 서로 공관을 설치한 몇 안 되는 나라죠. 북한 고려항공이 쿠알라룸프르 노선까지 뒀었지만 유엔 안보리 결의에 의해 운항이 중단됐고요. 게다가 관광사무소도 뒀었고, 말레이시아 총리가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로서는 양국 교역이 미미한 상황에서 이런 관계를 통해 얻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대신 말레이시아를 경화 획득과 유엔 제재 회피의 근거지로 삼아온 북한만 혜택을 본 겁니다.
기자) 말레이시아가 북한과 비자면제협정까지 체결하면서 굳이 관계를 개선해온 이유는 뭔가요?
이그네이셔스 전 차관) 가능한 모든 나라에 문호를 개방하고 최선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말레이시아의 대외정책 방침 때문이었습니다. 말레이시아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과 미사일 시험을 우려하고 공개적으로 비판해왔지만, 어떤 나라와도 외교 관계를 맺는다는 기조를 유지해 왔습니다. 이 역시 북한에만 이득이 된 거죠.
기자) 말레이시아 헬프대학이 몇 년 전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명예박사 학위까지 수여한 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그네이셔스 전 차관) (웃음) 어처구니 없는 일이죠. 명예 학위 증명서에 써 있는 내용을 읽어보면 웃음밖에 안 납니다. 말레이시아 대학이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 걸로 보입니다.
기자) 말레이시아주재 북한대사가 말레이시아 당국의 김정남 씨 피살 사건 수사를 북한에 적대적인 세력과 야합하는 태도로 비난했는데요.
이그네이셔스 전 차관) 북한대사의 접근법에 외교 수완과 요령이 결여돼 놀랐습니다. 북한을 방어하려는 노력은 이해하지만, 외교관 업무를 어렵게 만들 정도로 주재국을 적대시해선 안 된다는 게 외교의 철칙이기 때문입니다. 북한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말레이시아가 그런 비난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북한이 암살 배후가 아니라면 경찰 수사에 협조하는 것이 논리적 수순인데, 북한은 스스로를 잘 변호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당초 이 사건에 사무적 접근을 했지만, 북한대사가 분노를 표출하며 근거 없는 비난을 하자 강경한 태도로 돌아섰습니다. 저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외국 정부를 상대로 이렇게 강하게 반응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 두 나라 관계는 다시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수사 결과를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번 사건에 북한 정권이 연루됐다고 판단하십니까?
이그네이셔스 전 차관) 이 정도 대형 사건이라면, 그(김정은)가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강철) 북한대사의 발언은 말레이시아 당국뿐 아니라 북한 정부에 보내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그의 전임자는 소환된 뒤 처형됐습니다. 북한 대사 역할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고, 더구나 이런 사건이 벌어졌을 땐 더욱 그렇죠. 북한대사가 이렇게 거친 언행을 보이는 건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기자) 말레이시아 정부가 북한과의 비자면제협정을 파기했습니다. 잘 한 결정이라고 보시나요?
이그네이셔스 전 차관) 물론입니다. 당초 왜 북한과 그런 협정을 체결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북한은 오랫동안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온 불량국가입니다. 북한에서 말레이시아 관광객이나 사업가는 볼 수 없는데, 북한 관리와 요원들은 비자면제협정을 통해 말레이시아에 들어와 자유롭게 활동해 왔습니다. 말레이시아의 느슨한 이민 통제와 감독을 고려할 때 이번 사건은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북한과의 비자면제협정 파기 결정을 환영합니다.
기자) 말레이시아가 북한의 불법 활동에 이용되고 있다는 뜻입니까?
이그네이셔스 전 차관) 그렇습니다. 북한은 어떤 자유나 사기업 활동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저는 1980년대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는데, 그 뒤로도 바뀐 게 별로 없습니다. 북한 개인은 스스로의 의지나 이득과 관계 없이 국가 이해를 위해 움직입니다. 여행의 자유가 없는 북한인들이 말레이시아에 오는 것도 모두 당국의 뜻이자 경화를 벌어들이겠다는 목적 때문이고, 이는 전세계 북한대사관의 주요 임무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식당 운영에서 밀수까지 온갖 활동을 벌이고, 현지 회사를 세워 유엔 제재를 회피하려고 합니다. 북한의 이런 이해는 외교 공관의 기능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기자) 애초에 말레이시아 정부 내에서 그런 우려의 목소리는 없었나요?
이그네이셔스 전 차관) 그런 활동에 대한 말레이시아의 감독은 전반적으로 매우 느슨합니다. 순진하고 잘 속아 넘어가는 태도였다고 할까요? 따라서 이번 사건이 경종을 울렸을 겁니다. 말레이시아 내 북한인 등을 훨씬 엄격히 감시하는 계기가 될 것이고,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인 규모를 급격히 축소하는 조치가 뒤따를 것으로 예상합니다.
기자) 말레이시아 정부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 생각도 그렇습니까?
이그네이셔스 전 차관) 그렇습니다. 대중들은 말레이시아에 그렇게 많은 북한인들이 들어와 있고, 원래 일하게 돼 있는 회사에서 하루도 근무하거나 월급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 돼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정부 조치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비자면제협정 취소는 대북관계 재검토 과정의 첫 단계일 뿐이고, 북한인들의 많은 현지 활동에 큰 제약을 가하는 등 후속 조치가 뒤따를 겁니다. 두 나라 관계는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습니다.
기자) 말레이시아가 북한과의 외교관계 단절까지도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하시겠습니까?
이그네이셔스 전 차관) 아무 소용없는 평양주재 말레이시아대사관은 꼭 폐쇄해야 합니다. 북한이 현재 보여주는 행동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강한 신호로서 말입니다. 하지만 외교관계를 단절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가 간 관계가 악화돼 대사를 소환하기도 하지만 관계를 단절하는 단계까지는 좀처럼 가지 않으니까요. 평양의 말레이시아대사관을 닫는 것으로도 충분히 강한 신호가 될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기자) 미국 등이 “노예 노동”으로 규정하는 북한 노동자 수 백 명이 말레이시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이 노동자 파견 문제에도 영향을 줄까요?
이그네이셔스 전 차관) 북한 노동자들은 광산 등 아무도 일하고 싶어하지 않는 위험한 곳에서 노예처럼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북한 노동자들을 절대 받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말레이시아가 북한과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는 만큼 이런 관행도 중단되기를 기대합니다.
기자) 앞서 1980년대 북한을 여러 번 방문하셨다고 했는데, 그 때 어떤 인상을 받으셨나요?
이그네이셔스 전 차관) 저는 1979년부터 1982년까지 중국에 주재했고, 베이징 대사관에서 북한과의 외교 업무를 대행해 평양을 5~6 차례 갔습니다. 김일성 주석과 지도부를 만났는데, 김정일 위원장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때 사회 전체가 얼마나 통제되고 세뇌됐는지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김일성 주석과 면담을 했는데, 회의 석상에 함께 앉은 북한 총리와 외무상 등 고위 관리들이 하나같이 수첩에 기록을 하면서 김 주석이 웃으면 따라 웃고 웃음을 멈추면 똑같이 멈추더군요. 김 주석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는 그들에게서 공포심이 느껴졌습니다. 트랙터 디자인에서 교과 과목 선정까지 모든 걸 “위대한 수령”이 직접 했다고 자랑했는데, 굉장한 볼거리였습니다. 북한이 전세계에서 가장 선진국이고 한국은 미국의 노예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실제로 믿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그런 `공포정치’는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데니스 이그네이셔스 전 말레이시아 차관으로부터 김정남 씨 피살 이후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북한과 말레이시아 관계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대담에 백성원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