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북한인권법에 근거해 탈북 난민들이 미국에 정착하기 시작한 지 어제(5일)로 10년이 됐습니다. 저희 VOA는 탈북 난민 미국정착 10년을 맞아 세 차례 특별기획을 보내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순서로 미국정착 탈북 난민 1호 데보라 씨의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보도에 이연철 기자입니다.
[녹취: 데보라] “진짜 누가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별에서 온 느낌이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엄청 뒤떨어져 있으니까 이걸 따라가자면 앞으로 힘든 일이 많겠죠. 그래서 좀 부담스러운 점도 있고 과연 잘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느낌도 들고요.”
미국 정착 탈북 난민 1호 데보라 씨가 10년 전 새로운 나라 미국에 도착했을 때 밝힌 소감입니다. 당시 데보라 씨는 기회의 나라 미국에서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데보라 씨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10년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직접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녹취: 데보라] “10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금방 흘러버린 것 같아요. 그 동안 열심히 살았던 것 같고, 빈 두 주먹으로 왔던 제가 재산이 제 이름으로 많이 늘었고요, 혈혈단신으로 와서 가족이 생겼고, 이쁜 두 얘기도 생겼고…”
데보라 씨는 현재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 주에서 해산물 상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해산물을 직접 팔기도 하고 요리를 해서 음식으로 팔기도 합니다.
4년 전 결혼하면서 남편이 이전부터 하던 가족 소유의 상점에서 함께 일했지만, 2년 전에 자신 소유의 상점을 내면서 독립했습니다.
특히, 데보라 씨는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도전해 새로운 사업을 일군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녹취: 데보라] “제가 가게를 보고 찾아 다니고 계약하러 다니고, 제가 한 것이거든요. 남편이 안 될 것이다 이러면서 반대하더라고요. 그런데 나는 해 볼 거야 해 보자 안 되면 할 수 없고, 2년 전에 반대하는 것을 도전정신으로 했는데……”
데보라 씨는 새롭게 사업을 시작한 지 2년 밖에 안 됐지만 벌써 입소문이 퍼지면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난 데보라 씨는 미국에 정착한 지 6년 만인 지난 2012년에 결혼했습니다. 곧 이어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은 데보라 씨는 지금 4살과 3살 연년생 남매를 키우고 있습니다.
[녹취: 데보라] “아기들이 없었던 삶이랑 지금 아기들을 키우는 삶이랑 진짜 다르거든요. 그 전에는 서른 살 먹었어도 철 없고 나 밖에 몰랐는데, 아기를 낳고 나서 제가 많이 성숙해지고…”
데보라 씨는 미국에 정착한 지 6년 만인 지난 2012년에 미국 시민권을 받은 것도 감격스러운 일 가운데 하나로 꼽았습니다.
탈북 난민들은 미국에 입국한 뒤 1년이 지나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고, 5년이 지나면 시민권을 신청해 미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습니다.
데보라 씨는 시민권을 받으면서 북한에서는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던 자아를 되찾은 느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데보라] “북한에서 나는 그저 조국에 바쳐야 되는 존재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라는 존재의 자아가 전혀 없이 자존감도 없이 거기서 살다가, 또 중국에서 2년 동안 숨어 살고 신분도 없이, 그런 것도 다 당해 봤잖아요. 그런데 미국에 와서 공식적으로 미국 시민이 됐잖아요. 거기서 나를 찾은 것 같아요.”
데보라 씨는 시민권을 받은 지 얼마 안돼 실시됐던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직접 투표한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물론 10년 동안 데보라 씨에게 힘든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정착 초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 낮에는 하루 종일 일하고 밤에는 대학을 다녀야 했습니다.
또한, 지금은 해산물 상점을 운영하고 살림을 하면서 연년생 남매를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몸도 힘든 상황입니다.
하지만, 데보라 씨는 열심히 하는 만큼 좋은 결과가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힘든 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데보라] “ 북한에 살 때는 열심히 일해도 국가에 다 바쳐 가지고 저한테는 돌아오는 게 없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내가 노력하면 다 나한테 오는 거잖아요. 제가 열심히 한 만큼 저한테 다 대가가 오고 그렇게 하니까 저는 점점 더 욕심도 나고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데보라 씨는 미국에 온 것을 한 번 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자기가 열심히 하면 빛을 볼 수 있고,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라오는 점이 좋았습니다.
또, 데보라 씨가 힘들었을 때 큰 힘이 돼 준 고마운 사람도 있었습니다.
[녹취: 데보라] “뉴욕에 김영란 두리하나 선교사님이라고 계시거든요. 진짜 어머니 같은 심정으로 저희를 공항에서 맞아주시고, 지금도 10년째 한결 같이 챙겨주고 계시거든요.”
데보라 씨는 한인 교회 같은 곳에서도 도움을 받았지만, 처음에만 관심을 갖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면 지원이 중단됐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김 선교사는 지금도 10년 전과 똑 같은 모습으로 도와주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데보라 씨는 김영란 선교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힘든 시절을 견뎌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김 선교사는 데보라 씨가 10년 전 뉴욕의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 도착할 때 처음 만나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김 선교사는 데보라 씨가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데보라] “데보라는 와서부터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일분 일초도 시간 안 없애고 일하고 학원에 가고 공부하고 학교에 가고 정말 굉장했어요.”
특히, 데보라 씨는 도움을 받는 것에만 익숙한 다른 탈북 난민들과는 달리, 지금은 다른 탈북 난민들을 돕는 일에도 나서고 있다고, 김 선교사는 말했습니다.
데보라 씨는 또, 미국 정부에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으면 길거리에서 떠돌다가 죽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데보라 씨는 미국 정부가 더 많은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받아들여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녹취: 데보라] “그 사람들도 똑 같은 사람들이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를 누릴 권한이 있는데 그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렇게 불이익을 당하고… 그래서 그들이 더 많이 받아들여져서 기본적인 인간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미국 정착 10년을 맞은 데보라 씨는 별도로 특별한 계획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금처럼 열심히 살다 보면 10년 후에는 더 발전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녹취: 데보라] “항상 북한에 대한 마음을 안고, 제 뿌리가 북한이니까, 그 사람들 몫까지 해 나간다는 심정으로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서 살다 보면 또 다른 10년 후에도 커다란 발전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VOA 뉴스 이연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