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소개해드리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현대 여성운동의 어머니로 불리는 베티 프리던을 만나보시겠습니다.
베티 프리던은 '여성의 신비(Feminine Mystique)'라는 책을 써서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는 평을 들을 만큼 유명한 여성운동가입니다. 1920년대 미국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힘, 그리고 삶의 만족감 등은 극히 열악했습니다. 여성은 가정을 지키는 존재로만 인식되고 있었고, 투표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1920년이 처음이었습니다. 일을 하는 여성도 드물었고, 전문직 학교에도 여성은 드물었습니다. 일부 여성들이 남성과 같은 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받는 돈은 늘 남성보다 적었고, 출산을 하면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여성의 신비라는 책의 주된 내용은 그 시절 여성에 대한 인식, 즉 여성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집안 살림을 꾸려 가는 데서만 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통념을 정면으로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프리던은 여성은 남편과 자녀를 기쁘게 하는 것 이상의 것을 원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여성들은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에게는 “남편과 애들에게 목매달지 말고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을 찾으라”고 외쳤습니다. 이 책은 뉴 페미니스트 운동 즉 새로운 여성운동에 불을 지폈습니다. 여성학에 있어 역사적 사건의 하나가 됐고, 미국 여성들의 삶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집을 벗어나 일을 하기 시작했고, 법률이라든가 공학, 의학 등 전통적으로 남성들의 전유물 이다시피 한 전문직 교육기관에 여성들의 수가 크게 늘었습니다. 팔린 책은 300만부가 넘었고 국제적으로도 큰 관심을 끌어 여러 나라 말로도 번역 출판됐습니다.
베티 프리던은1921년 미국 중부 농장지대인 일리노이 주 ‘피오리아’라는데서 태어났습니다. 프리던은 동부 명문 스미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습니다. 1942년 대학을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캘리포니아 대학 시스템인 버클리 대학원에 진학을 합니다. 그때 프리던에게는 남자 친구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 친구는 여자가 심리학으로 석사나 박사가 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베티는 여자가 공부를 많이 하는데 거부감을 느낀 그런 남자와는 사귈 수가 없다 하고, 결별을 합니다. 그리고 뉴욕으로 가서 노동조합에서 발행하는 신문사의 기자 겸 편집인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947년 베티는 극장의 감독이었던 칼 프리단이라는 남자와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베티는 베티 골드스타인에서 베티 프리던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둘 사이에는 3명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신문사에서는 프리던에게 그만두라고 합니다. 할 수 없이 그만두고 이런 저런 잡지사의 독립된 기자로 일을 했습니다. 요새 말로 프리랜서죠. 그런데 전통적인 여성의 삶의 방식에서 조금만 벗어나는 글을 쓰면 편집자가 그걸 막았습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좌절을 겪은 거죠.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던 프리던은 다른 여자들은 어떨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모교인 스미스 칼레지에서 졸업 15년 기념 모임이 있었습니다. 프리던은 동창들에게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여론조사를 해봤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삶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프리던은 좀더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갑니다. 전국의 여러 전문가들로부터도 많은 질문과 대답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관찰과 경험을 이 연구에 종합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바탕이 돼서 1963에 유명한 책 여성의 신비를 내놓은 것입니다.
베티 프리던은 여성 문제를 분석만 한 것이 아니라 권익향상을 위한 행동에도 나섰습니다. 프리던은 1966년 미국 최대여성단체 전미여성기구, The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약칭 NOW를 조직합니다. NOW는 쉽게 ‘나우’로 불리웁니다. 그리고 초대 회장이 됩니다.
나우는 일자리를 구하는 여성들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성들이 임신을 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선택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직장 여성들이 아이를 맡길 수 있는 탁아소를 설치하는 운동도 벌였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결정하는데 여성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여성의 권리 주장을 위한 뉴욕의 대규모 시위도 벌였습니다. 1970년 8월 26일, 뉴욕에서 여성평등권을 외치며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당시 5만여 명의 여성이 그의 뒤를 따랐고 이어 미국 전역으로 번져갔습니다. 이날 시위에는 전국적으로 약 50만명이 참여 했습니다. 이날은 여성의 투표권 획득 50주년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뉴욕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던 다음 해 베티 프리던은 정치 운동에도 착수합니다. 프리던은 1971년에 전국 여성 정치 코커스라는 기구를 출범합니다. 그러면서 미국 여성들이 동등한 대우를 받으려면 공직에 보다 많은 여성들이 진출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합니다.
프리던은 연방 의회와 여러 주를 수없이 드나들며 여성의 평등을 향상시키기 위한 헌법수정, 즉 'Equal Right Amendment', ERA 운동을 벌였습니다. 이 헌법 수정안은 모든 미국인은 성에 관계 없이 동등한 권리를 갖도록 보장하는 내용이고, 구체적으로는 이혼, 재산, 고용, 기타 여러 가지 사안에서 남녀를 구분하는 것 자체를 없애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1971년에 연방 하원에서 ERA가 통과됩니다. 상원에서도 그 다음 해에 이 수정안을 통과시킵니다. 7년 안에38개 주만 찬성하면 법이 됩니다.
그러나 기한 내에 찬성하는 주가 35개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ERA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보수적인 남부 지역 주들이 이에 반대했습니다.
ERA 실패 후 프리던은 1981년에 여성운동의 조건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제목이 ‘제2단계’라는 책인데요, 프리던은 이제 대규모 시위 등의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니 여성운동은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여성 기구인 ‘나우’의 일부 젊은 층은 프리던이 너무 보수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베티 프리던은 연로해지면서 노인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1993년에 “연륜의 샘”이라는 저서를 내 놓았는데, 사회가 노인들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존재 또는 쓸모 없는 존재로 취급한다면서 개선을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80세가 가까운 2000년에 “지금까지의 삶”이란 책을 냈습니다.
베티 프리던은 2006년 2월 6일에 타계했는데, 마침 그날이 생일날이기도 했습니다. 프리던은 언젠가 한 텔레비전 기자가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성으로 태어났다는데 대해 좋은 느낌을 갖는 여성이 되도록 만드는데 기여한 사람, 그래서 여성들이 좀더 자유롭게 남성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