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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미국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지난 1963년 8월 28일에 열린 워싱턴DC 대행진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연설을 하고 있다.
미국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지난 1963년 8월 28일에 열린 워싱턴DC 대행진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연설을 하고 있다.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소개해드리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오늘은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의 삶을 조명해봅니다.

[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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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수백 년 동안 이루지 못했던 미국의 인종 평등을 이끌어 낸 비폭력 민권운동의 지도자였습니다.

마틴 루터 킹의 민권 운동의 시발점은 미국 남부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시내 버스 좌석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몽고메리 시내 버스는 백인이 앞에 앉고 흑인은 뒤에 앉아야 한다고 규정돼 있었습니다.

1955년 12월 1일,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던 로사 팍스라는 흑인 여성은 너무 피곤해 앞 좌석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운전사가 팍스 여인에게 백인에게 자리를 내주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러자 팍스 여인이 여기에 응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결국 팍스 여인은 법을 위반한 혐의로 체포됐고 이 사건은 전국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1년 남짓 이 도시에서 목사로 있으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해오던 젊은 킹 목사는 이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킹 목사는 몽고메리 시가 운영하는 버스 좌석 차별 제도에 항의해, 버스 안 타기 운동 즉 보이콧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흑인들이 많이 사는 남부에서 인종 차별 제도에 대해 조직적인 항의운동이 일어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남부에는 거의 모든 주에 흑백을 분리하는 법이 존재했습니다. 흑인들은 흑인 전용 학교에만 다녀야 했고 사는 곳도 별도의 지역에서만 살아야 했습니다. 식당도 따로, 화장실도 따로 가야 했습니다. 흑인들은 백인과 같은 권리를 가질 수 없었고, 가난했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1929년 미국 남부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침례교회 목사였고 어머니도 매우 신앙심이 깊은 여성이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15살에 애틀랜타에 있는 무어하우스 대학(Morehouse College)에 들어갔습니다. 남부 지역에서 흑인이 갈수 있는 몇 안 되는 대학 중 하나였습니다.

1948년 무어하우스를 졸업하고 3년 동안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크로저 신학대학으로 진학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이때 인도의 무저항주의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의 철학에 심취했습니다. 그가 비폭력 시위를 원칙으로 삼은 건 간디의 영향이 컸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1955년 보스턴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보스톤에 있는 동안 뉴잉글랜드 콘서버터리에 다니던 코레타 스콧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스콧 여사는 일생 동안 민권운동의 동반자가 됐습니다.

1955년 버스 보이콧 운동을 주도한 킹 목사는 위협도 많이 받았습니다. 두 번이나 체포되기도 했고, 살해 위협도 계속됐습니다. 백인들은 버스 보이콧 운동이 곧 시들해질 것으로 믿었지만 장장 382일 동안이나 계속됐습니다.

결국 미국 연방 대법원은 1956년 11월 몽고메리 버스 시스템의 인종 차별 제도는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킹 목사와 그의 동료들의 투쟁이 승리한 것입니다. 이 판결은 비단 한 도시의 버스 좌석 문제만 시정한 것이 아니라 흑인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불어 넣었고, 새로운 긍지와 단결심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킹 목사는 미국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수많은 강연 요청도 들어왔습니다. 미국 남부 여러 곳에서는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평화적인 시위가 줄을 이었는데 그런 운동도 모두 나가서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이런 민권운동은 급속도로 번져 남크리스천 지도자 대회라는 조직이 탄생했고, 그 회장에 킹 목사가 선임됐습니다. 흑인 운동가들은 자주 구타를 당하고 체포됐습니다. 때로는 숨지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그 중 커다란 사건이 1963년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서 발생했습니다. 식당에서 흑백 좌석 차별을 하지 말고 흑인에게도 일자리를 주라는 시위였습니다.

이때 경찰이 물 대포를 쏘고 개를 풀어 위협하는 장면은 지금까지도 종종 방송에서 나올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충돌로 여러 사람이 체포되고 곧 풀려나기는 했지만 킹 목사도 체포됐습니다. 민권운동 단체들은 보다 많은 일자리와 백인 학교에 흑인 자녀도 다닐 수 있게 하라고 요구하며 버밍햄 시내의 상점 불매운동을 벌였습니다. 이 운동은 국제적인 뉴스가 됐고 급기야는 백인들이 민권운동가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버밍햄 승리는 민권운동의 분수령이 됐습니다.

킹 목사는 흑백 차별 반대 운동에 대한 전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워싱턴 DC 대행진을 벌였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 워싱턴에서는 여러 가지 행진이 벌어졌으나 1963년 8월 28일 행진은 사상 최대 규모였습니다. 이 행진은 흑인들에게 보다 많은 자유와 일자리를 요구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킹 목사는 그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연설로 차별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호소했습니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유대인이든,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모두 손을 잡고, ‘자유가 왔다!’는 흑인영가를 부를 수 있는 날을 만들자는 신념에 찬 연설에 청중은 환호했습니다.

1964년, 드디어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민권법에 서명했습니다. 이 법은 공공장소에서의 인종 분리나, 인종, 피부색, 종교, 성, 또는 민족을 이유로 고용에서 차별하는 행위는 불법으로 규정했습니다. 인권운동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킹 목사는 그 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이 민권법은 1965년에 투표권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법은 투표와 관련돼 인종차별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했습니다. 또 1968년에 나온 평등주택법은 거주, 또는 주택 구입을 위한 융자 등에서 차별을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킹 목사는 그러나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는 차별과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1968년 4월 4일에 총을 맞고 숨졌습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불과 39세의 젊은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뿌려놓은 밑 거름에 힘입어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흑인 대통령까지 등장했습니다.

사람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값지게 사느냐라고 역설했던 마틴 루터 킹, 그는 미국 뿐 아니라 억압받고 차별 당하는 전 세계 모든 사람의 희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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