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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방송 저널리즘의 아버지, 에드워드 R. 머로우


에드워드 R. 머로우가 CBS(Columbia Broadcasting System) 방속국에서 일하는 모습.
에드워드 R. 머로우가 CBS(Columbia Broadcasting System) 방속국에서 일하는 모습.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방송 저널리즘의 아버지, 에드워드 R. 머로우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방송 저널리즘의 아버지, 에드워드 R. 머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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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R. 머로우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뉴스를 처음으로 개발해 방송 저널리즘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에드워드 머로우를 방송 저널리즘의 태동기에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인물이라고 평가합니다. 에드워드 머로우는 2차 세계대전 소식이라든지 매카시 선풍을 비롯한 미국의 정치적 사건 등을 미국인들이 안방에서 처음으로 듣고 볼 수 있도록 한 언론인이었습니다.

에드워드 머로우는 1930년에 미국 서부에 있는 워싱턴 주립 대학을 졸업하고 1932년에 국제 교육 연구소(The Institute of International Education)란 곳에 취직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국장보(assistant director)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35년에 당시 CBS(Columbia Broadcasting System) 방송국에 들어가면서 방송인이 됐습니다. 텔레비전은 없고, 라디오 방송뿐이었던 당시 CBS는 몇 개 안 되는 미국의 주요 방송 네트워크 중 하나였습니다.

머로우는 처음 CBS에서 라디오 프로에 출연할 유명 인사들을 섭외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2년 후에 머로우는 CBS의 유럽 지국장으로 임명돼 영국의 런던으로 옮겨 갔습니다. 런던에서도 그가 한 일은 방송이 아니라 유럽의 관리들이나 전문가들이 CBS 방송에 출연해 해설을 하도록 섭외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은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나치당이 독일에서 권력을 잡으면서 전운이 감돌던 때였습니다. 새로운 소식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였지만 CBS의 간부들은 뉴스를 자회사의 직원들에게 맡기는 것을 꺼렸습니다. 보도라면 신문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던 때여서 방송사 직원이 라디오에서 뉴스를 전달하는 방식은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머로우는 윌리엄 L. 샤이러라는 신문기자 출신을 발탁해 자신들이 보고 들은 일을 라디오에서 직접 전달하는 특별한 일을 시도했습니다. 1938년 3월 당시로써는 혁신적인 이 기획에서 머로우는 오스트리아가 나치에 의해 함락당하는 모습을 보도하는 30분짜리 방송을 만들었습니다. 머로우는 나치 군대가 오스트리아의 수도에 입성하는 모습을 직접 현지에서 보도했습니다.

이어서 2차대전이 본격화되자 머로우는 1939년 런던, 베를린, 파리, 로마 등을 연결하는 생방송 시리즈를 시작했습니다. 그 같은 보도는 청취자들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여기는 런던입니다”로 시작되는 이 특집은 신문만으로 전해지던 전쟁 보도와는 너무나 다른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청취자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머로우는 현장에서 보고 경험한 것을 그대로 묘사했습니다. 청취자들은 폭탄 터지는 소리나 공습경보 사이렌 소리까지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머로우는 적절한 말을 고를 줄 아는 탁월한 기자였습니다.

머로우는 또 11명의 기자로 방송팀을 만들었습니다. 이들 중 몇몇은 후에 미국의 유명한 언론인들이 됐습니다. 이들은 ‘머로우 보이즈(Murrow Boys)’ 즉 ‘머로우의 아이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그들의 보도는 CBS 라디오 프로 ‘세계 뉴스 라운드업(World News Roundup)’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머로우는 그 같은 획기적인 보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유명인사가 됐습니다. 그의 업적으로 1946년 CBS는 그를 부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에 부사장 자리를 사임하고 직접 방송을 하는 자리로 되돌아갔습니다.

1950년대에는 텔레비전이 발달하면서 라디오 방송의 황금시대가 끝났습니다. 인기 있던 라디오 프로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TV를 보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갔습니다. 이때 에드 머로우와 그의 팀도 TV로 옮겨갔습니다. 머로우는 라디오에서 하던 ‘Hear It Now’, ‘지금 들으십시오’ 대신에 ‘See It Now’, ‘지금 보십시오’라는 시리즈를 만들었습니다.

머로우의 ‘See It Now’에서는 이른바 매카시 열풍의 허구를 파헤친 보도가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매카시 열풍이란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운동을 말합니다. 미국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가 주도한 이 운동에서 공산주의자와 관련 없던 많은 정치인들과 연예인들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머로우는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의 고발 내용의 허구를 파헤쳤습니다. 3부작으로 된 이 프로에서 머로우는 끈질긴 추적으로 매카시 상원의원의 고발들이 확실한 증거가 없고 과장된 내용이 많다는 점을 증명했습니다. 머로우의 보도는 매카시 상원의원의 지나친 공산당 사냥의 막을 내리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 프로는 방송 저널리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머로우의 ‘See it Now’는 그 밖에도 인종 차별 문제, 전쟁과 정부의 부정한 행태 등 중요한 문제들을 파헤치는 내용을 방송했습니다.

머로우는 ‘Person to Person’이라는 또 다른 TV쇼를 시작했습니다. 카메라를 유명인사들의 안방과 연결해 대화를 나누는 프로였습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 여배우 메릴린 먼로, 남자배우 말론 브랜도, 그때 상원의원이었던 존 F. 케네디 부부도 대화에 등장했습니다.

에드 머로우는 특별 추적 보도 프로도 많이 제작했습니다. ‘부끄러운 수확(Harvest of Shame)’이라는 보도에서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일하는 농장 노동자들의 힘든 삶과 열악한 생활상을 파헤쳤습니다. 사람들은 이 방송이 너무도 감동적이어서 미국의 국회의원들이 이들 계절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을 통과시켰다고도 평가하고 있습니다.

존 F. 케네디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에드워드 머로우를 미국 해외 공보처(USIA: 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의 처장으로 임명했습니다. USIA는 세계 각지에 나가 있는 미국 문화원, 영화제작소, 미국의 소리 방송(VOA) 등을 포함하는 연방정부 기관입니다. 지금은 USIA가 국무부로 통합되고 VOA는 새로운 기구에 소속이 됐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 VOA 복도에는 에드 머로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습니다. 머로우는 1961년부터 1964년까지 USIA 처장으로 재직했습니다.

폐암을 앓고 있던 머로우는 은퇴 후 1965년 뉴욕주 폴링에 있는 그의 농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머로우의 나이는 57세. 한창 일할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를 전 CBS 회장 윌리엄 페일리는 그 시대와 그 일을 위해서 가장 딱 들어맞게 만들어진 인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미국 시민에게 줄 수 있는 대통령 최고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머로우에게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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