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텔레비전의 아버지 필로 테일러 판스워스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인간의 달 착륙, 처참한 전쟁의 현장, 지구촌이 열광하는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매스컴과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텔레비전입니다.
오늘날의 텔레비전은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구 소련 등 여러 나라의 과학자들이 계속 발전시킨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전자식으로 영상을 송수신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개발한 사람은 불과 14살의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필로 테일러 판스워스(Philo Taylor Farnsworth)입니다.
필로 판스워스는 미국 서부 유타주에서 1906년 8월 19일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인디언크릭 (Indian Creek)’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낙후된 곳이었습니다. 비록 전기도 없었지만 어린 필로는 책에서 전기가 무엇이라는 걸 읽고 그 분야에 대단한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 후 가족은 아이다호주로 이사갔습니다. 새로 이사간 곳도 가난한 지역이었지만 전기가 들어오는 곳이었습니다. 필로는 아이다호주에 가자 금방 전기로 각종 실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불과 12살 때 전기 발동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처음으로 전기 세탁기도 만들었습니다.
필로는 가족 농장 부근에 있는 조그마한 학교에 다녔습니다. 학교에서는 특히 과학 성적이 뛰어났습니다. 필로는 어느 날 저녁 평소 즐겨보던 과학잡지에서 ‘공중을 날아가는 그림’이라는 글을 읽게 됐습니다. 잡지는 “공중에다 영상과 소리를 쏘아 다른 장소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 지금 그런 장치를 연구하는 중이다”라고 쓰여있었습니다.
필로는 이 이야기에 대단한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곧 그 같은 방식은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필로는 그와 같은 기계식이 아니라 모든 것을 전자로 바꾸어서 송수신하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때가 1921년 봄 고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필로 판스워스는 영상을 담는 카메라와 함께 전자 신호를 받아들이는 수신기를 구상했습니다. 수신기는 빛을 통 속에 가두어 놓고 그 것을 전자 선을 통해 스크린에서 영상으로 바꾸는 방식이었습니다. 필로는 그것을 ‘병 속의 빛’이라는 의미로 ‘light in a bottle’이라고 불렀습니다.
며칠 후 필로는 학교의 저스틴 톨만(Justin Tolman) 과학 선생님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보여줬습니다. 그림은 꽤 간단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의 전자식 텔레비전을 만드는데 필요한 과정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톨만 선생님은 필로의 아이디어에 크게 감탄했습니다. 톨만 선생님이야말로 필로의 구상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그의 앞길을 열어준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필로 판스워스는 텔레비전을 계속 개발하고 생산하는데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가장 큰 난관은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었습니다. 격리된 장소에서 영상을 재생시켜 볼 수 있는 장치에 대해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14살짜리 소년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전문가들은 당시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그런 아이디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10명도 안 됐을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필로 판스워스는 고등학교를 마친 다음 유타에 있는 브리검영대학교(Brigham Young University)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재학 중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필로는 대학을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21살 때는 다행히 어떤 자선단체의 지원을 받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그린스트리트(Green Street) 22번지에 연구소를 차리고 집중적인 연구와 실험을 계속했습니다.
1927년 9월 7일, 그날도 연구소 한쪽 방에는 그가 개발한 텔레비전 카메라가 간단한 그림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방에는 수신기가 있었습니다. 필로 판스워스는 긴장된 가운데 새로 만든 수신기의 전원을 켰습니다. 순간 옆방에서 보내는 영상이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줄이 그어진 간단한 그림이기는 했지만, 영상이 나타나는 순간 판스워스는 “There you are - electronic television!” 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전자 텔레비전이 드디어 만들어졌다는 뜻이었습니다.
몇 달 후 필로 판스워스는 자신의 발명품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을 여럿 만났습니다. 필로 판스워스는 그 후 ‘판스워스 텔레비전 & 라디오 코포레이션’이라는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필로 판스워스는 특허권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법정 싸움에 시달렸습니다. 필로 판스워스가 실제로 작동하는 텔레비전을 공개하자 이것을 자신이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러 명 등장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블라디미르 즈보리킨(Vladimir Zworykin)이었습니다. 즈보리킨은 러시아 태생으로 전자기기 회사인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에서 전자공학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굴지의 전자기업인 RCA는 즈보리킨이 1920년대에 영상을 재생하는 장치를 개발했다며 RCA가 텔레비전을 개발하고 생산하며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RCA는 소송에서 필로 판스워스가 즈보리킨의 텔레비전 카메라 기술, 즉 영상 튜브도 만들어 사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RCA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필로 판스워스의 발명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14살짜리 소년이 그런 걸 구상했다는 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고, 심지어 판스워스가 과학자가 아니며 대학도 마치지 못한 사람이라고 공격했습니다. 또 판스워스에게 실제로 전자식 텔레비전을 발명했는지 증거를 제시하라고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필로 판스워스는 증거물을 내놓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증인이 바로 필로의 고등학교 교사 저스틴 톨만이었습니다. 톨만 교사는 법정에서, 필로가 학교 다닐 때, 그러니까 RCA가 주장한 것보다 훨씬 이전에 자신에게 보여준 그림을 내놓았습니다.
그림을 보는 순간 RCA의 변호사들은 자신들이 이길 수 없음을 시인했습니다. 필로 판스워스가 훨씬 먼저 이를 구상했다는 것이 명백하게 증명됐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RCA는 판스워스로부터 판권을 사서 텔레비전을 생산 판매하게 됐습니다.
필로 판스워스는 자신이 텔레비전을 개발했으면서도 일생에 단 한 번 텔레비전에 출연했습니다. CBS방송의 퀴즈 게임에 나온 그는 자신이 텔레비전을 개발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시청자들에게 직접 설명했습니다. 출연 사례는 담배 한 상자와 현금 80달러였습니다.
필로 판스워스는 그 외에도 많은 것을 발명했습니다. 대부분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관련된 것들이지만 초기의 레이더, 전자 현미경, 우주 망원경, 조산아 보육기인 인큐베이터 개발에 기여했습니다. 또한 원자력의 평화적인 사용 방식도 개발했습니다.
필로 판스워스는 미국과 일부 외국ㅌ서 무려 300가지가 넘는 특허를 따냈습니다. 시사 주간지 ‘타임(Time)’은 금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 100명 중 필로 판스워스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의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습니다.
필로 판스워스는 1971년 3월, 64세로 타계했습니다.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 국회 의사당 안에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발명가의 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는 그의 동상이 서 있어 방문객들에게 그의 공헌을 되새기도록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