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민권 운동에 불을 지핀 여성 지도자, 로사 팍스 야기를 소개합니다.
로사 팍스 여사는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시내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명령을 거부해 흑인 민권 운동에 불을 지핀 여성이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에 의해 미국에서 흑인 노예 제도가 법적으로는 폐지됐지만, 흑백 차별도 사라진 건 아니었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 차별이 특히 심했던 남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서는 엄격한 버스 좌석 분리제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버스 앞 좌석 10번째 줄까지는 백인들이 앉고 흑인들은 뒷좌석에만 앉을 수 있었습니다. 중간석에는 흑인이나 백인 모두 앉을 수 있었지만, 백인석이 만원일 경우 그 자리도 흑인들이 양보하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1955년 12월 1일, 몽고메리시에서 재봉사로 일하던 42세의 흑인 여성 로사 팍스는 하루 일을 끝내고 피곤한 몸으로 버스에 탔습니다. 그리고 다른 흑인 몇 명과 함께 중간석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백인 승객 한 명이 더 탔습니다. 앞의 백인석에 자리가 없자 운전사는 차를 세우고 중간에 앉아있던 흑인들에게 모두 뒷자리로 이동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다른 흑인들은 모두 고분고분 말을 듣고 뒤로 옮겼으나 로사 팍스 여인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No"라고 말하고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운전사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팍스 여사는 체포됐습니다.
로사 팍스가 체포된 사실이 전해지자, 유색인종의 민권증진을 추진하는 단체 NAACP는 전단을 배포하고 모든 흑인에게 버스 보이콧 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이 사건은 신문에 보도되면서 몽고메리시 전체에 알려졌습니다. 이때 보이콧 운동을 지휘한 인물은 나중에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의 지도자가 된 26살의 마틴 루터 킹 목사였습니다.
당시 몽고메리 지역의 버스 승객 3/4은 흑인이었고 버스 운전자의 2/3도 흑인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버스를 타지 않자 버스 회사들은 운영이 어려워졌고 몽고메리시의 대중교통 체제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로사 팍스 여사가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서던 날은 4만 명, 버스를 이용하는 몽고메리시 흑인의 95%에 달하는 사람들이 버스 타기를 거부했습니다. 분노한 백인들과 흑인들 간에는 충돌이 자주 벌어지고 폭탄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보이콧 지도자들에게는 살해 위협도 가해졌습니다.
로라 팍스 여사는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 받았고 벌금형에 처해졌습니다. 팍스 여사는 항소를 제기했습니다. 결국 1956년 11월 13일 미국 연방 대법원은 흑인과 백인을 차별하는 몽고메리시의 버스 좌석 규정이 미국의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몽고메리시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다른 지역에도 연쇄 반응을 일으켰고, 미국 전역에서 흑인들에 대한 갖가지 인종 차별 폐지 운동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 같은 투쟁의 결과 1964년 미국 의회는 인종과 종교 차별 금지를 골자로 하는 민권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로사 팍스는 1913년 앨라배마주 터스키기(Tuskegee)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결혼 전 이름은 로사 루이스 매콜리(Rosa Louise McCauley)였습니다. 학교는 11살 때까지 다녔습니다. 그리고 큰 도시인 몽고메리시로 가서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로사는 앓아누운 할머니를 보살펴야 했고, 또 그 다음에는 어머니가 앓게 돼 중학교를 일찍 중단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21살이 돼서야 겨우 고등학교를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로사는 1932년에 레이먼드 팍스라는 남성과 결혼했습니다. 이발사인 레이먼드 팍스는 민권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팍스 부부는 NAACP에 들어가 흑인들의 권익향상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습니다.
팍스 여사는 버스 사건 때문에 유명인사가 됐지만, 가족은 고향을 떠나 북부 디트로이트시로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 단체인 KKK와 지역 백인들의 위협이 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사 팍스는 그곳에서 민권 운동의 대변인 역할을 하며 다양한 권익향상 운동을 펼쳤습니다.
1996년 빌 클린턴 대통령은 팍스 여사에게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인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수여했습니다. “인권운동가는 은퇴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던 팍스 여사는 2005년 10월 24일, 92세로 디트로이트에서 숨졌습니다.
그의 시신은 미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워싱턴의 국회의사당 중앙 홀에 안치돼 시민들의 조문을 받았습니다. 약 4만 명의 조문객은 차례로 팍스 여사 유해 앞을 지나며 애도의 뜻을 표했습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No라는 한 마디로 인종적 증오에 필살의 일격을 가한 용기 있는 여성으로 세계가 그녀를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로자 팍스 여사가 오랫동안 살았던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장례식이 거행되던 날, 미국의 모든 공공 기관은 조기를 게양하고 그녀를 추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