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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녹색혁명의 아버지, 노먼 볼라그


식물병리학자 노먼 볼라그.
식물병리학자 노먼 볼라그.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녹색혁명의 아버지, 노먼 볼라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녹색혁명의 아버지, 노먼 볼라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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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이오와주 의사당에서는 매년 ‘세계식량상’ 시상식이 열립니다. 인류의 식량난 해소와 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기여한 공로자를 표창하는 행사입니다. 식량 문제에 관한 한 노벨상 못지않은 영광으로 여겨지는 이 상의 수상자는 매년 세계 75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800여 명의 후보자 중 선발되고 있습니다.

이 상을 제정한 사람은 바로 이곳 아이오와 출신 농학자 노먼 볼라그입니다. 녹색혁명을 일으켜 세계의 식량난 해소에 크게 공헌한 노먼 볼라그는 질병에 강한 밀과 벼 등 개량된 품종을 만들어 냈고, 새로운 농사법을 농민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런 노력으로 세계 빈곤 지역의 식량 생산을 크게 늘려 수억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인물이라는 평까지 받고 있는 그는 녹색혁명의 아버지로도 불리우고 있습니다. 볼라그는 그 공로로 197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노먼 볼라그는 1914년 3월 25일, 미국 중부 대평원인 아이오와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농장 지대인 이곳에서 부모들도 농사를 지었습니다. 볼라그는 후에 한 인터뷰에서 그런 시골 생활 덕에 농업에 대한 실질적인 경험을 많이 쌓았다고 말했습니다.

대부분 그 지역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마치고 직장을 찾아다닐 때 노먼의 부모들은 그에게 공부를 계속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미네소타 대학에 들어가 임학을 전공했습니다. 노먼은 농장에서 하루 50센트를 받고 일을 하면서 대학엘 다녔습니다.

1937년에 졸업을 한 그는 미국 정부의 임업부에 들어가 일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미네소타대학으로 돌아와 식물 병리학을 공부해 1942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나중에 미네소타대학은 식물학연구소가 있는 건물을 볼라그홀(Borlaug Hall)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2차 대전이 터지자 볼라그는 군 복무 대신 화학회사인 뒤퐁(DuPont)에 들어가 미생물학 연구원으로 일을 했습니다. 고향에 있을 때나 대학에 다닐 때 대공황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본 볼라그는 식량 생산을 늘려 사람들을 굶주리지 않게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1944년 볼라그는 뒤퐁을 그만두고 록펠러 기금으로 운영되는 멕시코의 농업기술 지원계획에 들어갔습니다. 그로부터 20년 이상 볼라그는 멕시코의 농학자들과 함께 보다 튼튼하고 저항력이 강한 품종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가 개발한 일명 앉은뱅이 밀은 키가 작고 그루 당 많은 알곡이 열렸습니다. 이 품종으로 같은 면적의 농토에서 생산량은 과거보다 세배나 네 배까지 늘어났습니다. 이처럼 포기를 작게 하는 방식은 녹색혁명의 기반이 됐습니다.

1940년대 초 멕시코는 밀의 60%를 수입에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1956년이 되자 새로운 품종으로 전 국민이 필요로 하는 밀을 모두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1963년부터 멕시코는 밀을 수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볼라그와 그의 팀은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들 나라의 많은 농민은 과거보다 네 배가 넘는 수확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파키스탄은 1968년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로부터 6년 후 인도도 식량 자급을 이루었습니다. 볼라그는 자신의 농사법을 중동 여러 나라와 브라질, 칠레, 콜럼비아, 에콰도르 등 중남미 지역에도 전파했습니다.

지난 2006년 노먼 볼라그가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에게 대통령 훈장인 '자유 메달'을 받고 난 휘 엄지를 치켜들고 있다.
지난 2006년 노먼 볼라그가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에게 대통령 훈장인 '자유 메달'을 받고 난 휘 엄지를 치켜들고 있다.

볼라그는 1977년 미국 최고의 민간인 상인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30년 후에는 의회 금메달을 받았습니다.

볼라그가 남긴 유산 중에는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는 1986년 창설한 ‘세계식량상(World Food Prize)’입니다. 또 볼라그펠로우쉽 프로그램은 외국의 농학자들을 매년 미국으로 초청해 미국 학자들과 교류의 장을 마련해주고 있습니다.

볼라그는 말년에 아프리카에 눈을 돌렸습니다. 그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함께 사사카와 아프리카 협회라는 조직을 통해 옥수수의 질과 생산량 증가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볼라그를 영웅으로 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환경 오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연보호 운동가들은 비료와 살충제를 사용하는 그의 농사법을 비판했습니다. 볼라그는 이에 대해 굶주리고 죽어가는 아이들과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진짜 기아가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볼라그도 나중에는 농민들에게 화학 제품을 너무 과하게 사용하지 말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볼라그는 1984년부터 텍사스주에 있는 텍사스A&M대학교에서 국제농업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임파선 암을 앓고 있던 그는 2009년 9월 타계했습니다. 가족들은 그가 숨을 거두자 성명을 내고 그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고 인류의 고통을 해소한다는 목표를 향해 노력한 하나의 모범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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