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고향과 동족을 지키기 위해 싸운 아파치 투사, 제로니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땅과 삶을 지키기 위해 싸운 전설적인 투사 제로니모는 미국 남서부, 오늘날의 애리조나주와 멕시코 일대에 퍼져 살던 아파치족이었습니다. 미국 서부에는 아파치 외에도 나바호, 푸에블로, 코만치 등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제로니모는 치리카후아 아파치였고, 그 아래 규모가 작은 베돈코헤족 사람이었습니다. 제로니모는 추장은 아니었지만 이 지역으로 진출한 강력한 멕시코군과 미국 군대에 맞서 30년 동안 자기 부족과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운 전사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제로니모는 1829년 6월, 멕시코 노도욘캐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재적이라고 할 만큼 사냥에 뛰어났습니다. 베돈코헤 족은 8천 명이 조금 넘었습니다. 수는 적은데 이들은 많은 적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가장 큰 적은 멕시코군이었습니다. 멕시코군은 아파치의 기습에 보복하게 되고, 그러는 과정에서 죄 없는 여자들과 어린이들이 희생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시 멕시코 정부는 인디언들을 쫓아내기 위해 아파치족 아이의 얼굴 가죽을 벗겨오는 자에게 당시로써는 꽤 큰 돈인 25달러의 포상금까지 내 걸었습니다. 그런 잔인한 행위도 제로니모와 그 부족의 전투 의욕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제로니모는 불과 17살 때 네 차례나 기습을 감행해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 무렵 제로니모는 알로페라는 여성과 결혼하고 세 자녀를 뒀습니다. 1858년 3월, 제로니모는 동료들과 함께 물물거래를 하러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는 동안 멕시코군 400명이 제로니모의 마을을 기습했습니다. 기습 소식은 공격을 피해 나온 한 소녀에 의해 아파치 남자들에 전해졌습니다.
제로니모가 마을로 돌아와 보니 어머니 아내, 그리고 세 자녀가 모두 처참히 살해돼 있었습니다. 분개한 제로니모는 200명의 전사를 모아 가족을 살해한 멕시코 군인들을 찾아 보복했습니다. 제로니모는 그 후 일생 동안 모든 멕시코인을 원수로 여기게 되고 만나는 대로 공격을 가했습니다. 멕시코 정부에 대한 제로니모의 보복은 10년 동안이나 계속됐습니다.
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이긴 미국은 멕시코가 차지하고 있던 광대한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여기에는 아파치 인디언이 살던 지역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 남서부 지역에서는 많은 금이 발견됐습니다. 그러자 백인 정착민들, 광산업자들이 아파치가 살고 있는 지역으로 물밀 듯이 몰려왔습니다. 이주자들과 아파치 사이에는 자연 충돌이 잦았습니다.
치리카후아족 추장이며 제로니모의 장인인 코치스는 앞날이 어떻게 될지를 짐작했습니다. 그는 제로니모에게 백인과의 싸움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백인들과 아파치족을 위한 보호구역을 설치하는 안에 합의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치리카후아 족을 지정된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아파치가 대대로 살아오던 고장에는 백인 정착민들이 들어왔습니다.
보호구역에서의 삶은 일단 싸움으로부터는 벗어났지만, 말라리아와 같은 각종 질병이 만연했습니다. 식량은 정부가 주는 배급에 의존했지만 일부 부패한 인디언 관리가 농간을 부리는 바람에 때때로 굶주림이 극심했습니다. 각종 금지 규정도 삶을 어렵게 했습니다.
4년 동안 보호구역에 살던 제로니모는 동조자들과 함께 그곳을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미국 군대와 정착민들을 공격했습니다. 미국 군대는 여러 차례 제로니모 전사들을 보호구역으로 인디언들의 탈출도 반복됐습니다. 제로니모는 전투 중 세 차례나 항복했다가 다시 싸우곤 했습니다.
1885년 미군은 5천 명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해 제로니모와 약 150명의 아파치 소탕전을 벌였습니다. 이 싸움은 제로니모 세력과의 마지막 전투가 됐습니다. 수적인 열세와 절망에 빠진 인디언들은 결국 항복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886년 여름 미군의 넬슨 마일즈 장군은 제로니모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항복한 마지막 치리카후아 아파치였습니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제로니모와 그의 집단은 전쟁 포로가 돼 27년이나 여기 저기로 이송됐습니다. 제로니모는 군 기지의 통제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도가 됐습니다. 제로니모와 치리카후아 인디언들은 감시 속에 살았지만 과거의 적인 백인들로부터 일종의 영웅 대접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기간 미국 정부도 제로니모를 여러 공식 행사에 등장시켜 미국의 인디언 정책이 성공했음을 과시했습니다. 사람들은 제로니모를 보러 모여들고 그의 사진이나 화살을 사갔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의 옷에 붙어있는 단추를 뜯어 가기도 했습니다. 정부의 인디언 문제 담당국은 1905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취임식장에도 제로니모를 초대했습니다.
제로니모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자기 부족 사람들을 애리조나의 고향 땅으로 보내 달라고 요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제로니모는 글을 쓸 줄 몰랐지만, 구술로 자서전을 남겼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1906년 ‘제로니모의 삶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됐습니다.
제로니모는 1909년 2월, 저녁에 말을 타고 가다 떨어졌습니다. 다친 몸으로 추운 밤을 밖에서 새운 제로니모는 다음 날 친구에 의해 발견됐습니다. 일단 군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그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됐습니다. 낙마한 지 6일 만에 결국 그는 조카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습니다. 여전히 전범 신분인 채 임종을 앞둔 그는 침상에 누워 이렇게 후회했습니다. “나는 결코 항복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최후의 1인이 될 때까지 싸워야 했다.”
그가 묻힌 곳은 포트실기지의 인디언 묘지. 그곳은 전범으로 잡혀 있다 고향을 그리며 숨져간 다른 아파치 인디언들도 함께 묻혀있는 묘지였습니다. 제로니모가 사라진 후 미국에는 그에 관한 수많은 출판물, 영화, 다큐멘터리, 음악들이 나왔습니다. 제로니모라는 명칭을 한 군 부대도 등장했고, 공정대원의 훈련에서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 “제로니모”를 외치기도 합니다. 미 해군 함정에도 제로니모호가 있었습니다. 미국 남서부에는 그의 이름을 딴 도시도 세 군데나 있습니다.
비록 죽고 죽이는 역사의 비극이었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지키려 애쓴 제로니모는 용맹의 상징으로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