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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따라잡기] 타이완의 어제와 오늘


11월 20일, 타이완 수도 타이베이의 한 시민이 지방선거 입후보자들의 현수막이 내걸린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자료사진)
11월 20일, 타이완 수도 타이베이의 한 시민이 지방선거 입후보자들의 현수막이 내걸린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자료사진)

뉴스의 배경과 관련 용어를 설명해드리는 ‘뉴스 따라잡기’ 시간입니다. 지난주 타이완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이 참패하면서 차기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차이잉원 총통이 이끄는 민진당은 타이완 독립을 추구하며 중국과 대립각을 세워왔고요. 현재 양안 간 군사적 긴장은 최고조에 달해 있는데요. 뉴스 따라잡기, 이 시간에는 타이완의 어제와 오늘, 타이완 정치 상황 등을 짚어보겠습니다.

“타이완, 중화민국”

타이완의 공식 명칭은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 (ROC)’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중국, China’는 공산당 체제의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을 말합니다.

중화민국이 있는 ‘타이완섬’ 면적은 약 3만 6천200㎢입니다. 한국 경상남∙북도를 합친 면적, 북한으로 치면 평양시 면적의 약 2배만 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섬이지만 산이 많은 산악섬으로, 높이가 3천m 이상인 산이 200개가 넘습니다. 섬의 약 60%가 산지다 보니까 주요 도시들은 주로 낮고 평평한 서쪽 해안 지대에 몰려 있는데요. 하지만 수도인 타이베이는 섬의 최 북쪽, 타이베이 분지에 있습니다.

전체 인구는 2022년 기준으로 약 2천320만 명, 그리고 타이베이시 인구는 약 269만 명이고요. 지난해 기준, 국내총생산(GDP)은 7천591억 달러로 세계 21위입니다.

“타이완은 주권 국가인가?”

그렇다면 타이완은 독립적인 주권 국가일까요?

이에 대해 타이완과 중국은 서로 다르게 주장합니다.

타이완은 자국이 ‘중화민국’이라는 공식 국호가 있는 엄연한 독립국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중국은 타이완이 자국 영토에서 이탈한 한 성일 뿐, 언젠가는 반드시 흡수해야 할 지역으로 간주합니다.

양측의 이런 대립은 중국 내전의 산물인데요. 1949년 중화민국의 장제스 국민당 정부가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타이완섬으로 정부를 옮겼는데, 그게 오늘까지 이르고 있는 겁니다.

중국은 타이완을 국공내전에서 이미 멸망한 ‘중화민국’을 내세우는 불법 정권이라고 주장하고, 타이완은 중국을 공산당이 반란을 일으켜 영토를 점령하고 불법적으로 세운 정권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옮겨갈 당시, 언젠가는 반드시 본토를 수복하겠다고 다짐했는데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국제사회에서 타이완, 즉 중화민국을 주권국가로 인정하는 나라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유엔은 지난 1971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일한 합법적 정부라고 인정했고, 이에 따라 오늘날 ‘중국’ 하면 본토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을 뜻하게 됐습니다. 반면 타이완은 유엔에서 탈퇴했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도 잃었습니다.

다만, 지금도 타이완을 불법 정권으로 지목하는 나라는 드물고, 양안 관계 특수성을 감안해 ‘대표부’ 등 외교 공관을 설치해 타이완과의 교류를 지속하는 분위기입니다.

미국 역시 지난 1979년 1월 1일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타이완과 단교했는데요. 하지만 같은 해 4월 ‘타이완관계법’을 만들어 타이완에 대한 방어용 무기 수출을 허용하고 경제, 문화, 인적 교류의 근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한국도 1992년 중국과 국교를 수립했지만, 타이완에 대표부 성격을 가진 기구를 두는 등 어느 정도 비공식 교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타이완 정치 제도와 정당들”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는 1949년 공산당에 패해 타이완섬으로 쫓겨난 뒤 이 지역에 계엄령을 발동하고, 약 40년간 일당 지배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1975년 장제스 총통이 사망하고 그 아들 장징궈가 총통직을 승계하면서 주민들 불만이 고조됐고, 급기야 일당 독재 철폐와 개혁을 촉구하는 시민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약 40년에 걸친 계엄령이 풀리면서 타이완은 민주화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이어 1989년 복수정당제가 도입되자 많은 정당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국민당과 민진당의 2강 구도에 여러 군소 정당이 난립해 있는 양상입니다.

타이완은 1993년 처음 지방선거를 치렀고요. 1996년에 처음으로 총통을 국민들이 직접 뽑았습니다.

그리고 2000년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 천수이볜 후보가 승리하면서 50년 이상 이어진 국민당 지배 체제에 처음으로 제동이 걸렸고요. 지난 2016년부터는 민진당 소속 차이잉원 총통이 타이완을 이끌고 있습니다.

민진당과 국민당이 정권을 두고 경쟁하는 상황에서 중국과의 관계는 중국과의 통일을 염두에 둔 ‘하나의 중국’을 고수하는 국민당과 타이완 독립을 선호하는 민진당 중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냉탕과 온탕을 오갔습니다.

“11.27 지방선거”

지난 11월 27일 타이완 지방선거에서 민진당이 참패했습니다.

민진당은 21개 현과 시 단체장을 선출한 이 선거에서 타이난과 가오슝 등 5곳에서 승리하는 데 그쳤습니다.

반면 국민당은 수도 타이베이를 포함해 13개 지역에서 승리했습니다.

차이 총통 정부는 중국과의 군사적 긴장 속에 선거 전략으로 안보 강화를 내세웠는데요. 하지만 경제와 코로나 대응 같은 민생 현안에 묻혀 이 전략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차이 총통은 선거 패배에 책임을 지고 당 주석직에서 사퇴했는데요. 하지만 민진당은 2024년 총통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습니다. 차이 총통은 3 연임 금지에 묶여 차기 총통 선거에 나갈 수 없습니다.

민진당은 지난 2018년 지방선거에서도 국민당에 참패했지만 2020년 총통 선거에서 차이 총통 재선을 끌어낸 바 있는데요. 이번 지방선거 결과가 2024년 총통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

최근 뉴스의 화제 인물을 소개하는 ‘뉴스 속 인물’ 시간입니다. 오늘 주인공은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입니다.

11월 30일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향년 96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장 전 주석이 백혈병과 장기 기능 정지로 숨졌다고 밝혔습니다.

장 전 주석은 1926년 8월 장쑤성 양저우에서 부유한 지식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43년 난징 ∙중앙대 산업기술전기기계학부에 입학했는데, 이 학교는 나중에 상하이 교통대로 통합되는데요. 장 전 주석이 훗날 상하이에 뿌리를 내리고 일명 ‘상하이방’ 거두가 된 건 이곳에서 공부한 게 기반이 됐습니다.


대학 졸업 후 상하이 등지에서 기술 전문인으로 살던 그는 문화 혁명이 끝난 뒤 외교국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관료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79년 덩샤오핑이 집권하고 중국 안에서 개혁개방이 시작된 후 그는 상하이시 당 서기에 오르며 승승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안에서는 기술 관료이면서 국제 감각을 갖춘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는데요. 그는 영어와 러시아어를 포함해 7개 언어를 간단하게 구사할 줄 알았고, 음악과 미술 등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장 전 주석의 정치 인생에 결정적인 사건은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입니다.

그때 시위가 상하이로 번지자 그는 주동자들을 처벌하며 강력히 대응해 당시 중국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덩샤오핑 눈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정치국 상무위원 겸 당 총서기에 선출돼 당권을 장악했고, 1993년 제5대 국가주석에 취임합니다.

그는 이후 10년간 중국을 통치하며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이어갔습니다.

장 전 주석은 자본가 계급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하고 시장경제 도입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중국을 확고한 경제 강국 반열에 올렸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는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는 등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외교적 고립 탈피에 주력했습니다. 또 그의 재임 기간, 홍콩과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됐습니다.

하지만 톈안먼 민주화 시위 강경 진압, 티베트인들과 소수 종교단체인 파룬궁 등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는 2002년 당 총서기직을 후임 후진타오에게 물려주며 정권 교체에 들어갔는데요. 하지만 2005년 3월까지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유지하며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장쩌민 전 주석은 그간 여러 차례 중병설이나 사망설이 돌기도 했는데요. 그때마다 공개 석상에 나와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19년 신중국 건국 70주년 열병식 참석을 끝으로 공개 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타이완의 정치 상황 살펴봤고요. 뉴스 속 인물로 최근 사망한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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