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자와 국군포로 등 북한 정권의 강제실종 범죄 피해자들이 고령화로 속속 숨지면서 해결 노력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이 문제에 미국 정부가 전례 없는 관심을 보이는 데 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보도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공산군에 포로로 끌려갔다 51년 만에 탈북해 한국으로 돌아온 귀환 국군포로 김성태 씨가 지난 10월 31일 향년 91세의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지난 5월, 귀환 국군포로 동료들과 함께 김정은 정권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지 반년 만에 기쁨을 채 누리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당초 소송을 제기했던 원고는 5명이었지만 김 씨 등 4명이 고령으로 숨졌습니다.
북한에서 평생을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탈북해 귀환한 국군포로는 80명. 그러나 생존자는 이제 10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귀환 국군포로들의 인권옹호 활동을 해온 신희석 법률분석관은 “정부가 국군포로 진상조사위원회조차 만들지 못한 채 국가 영웅이자 북한 인권 침해의 산 증인들을 떠나보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녹취: 신희석 법률분석관] “단순한 인권 침해 피해자일 뿐 아니라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잡혀가셨던 분들인데 정부가 노력해서 석방된 게이스가 없거든요. 악순환이죠. 왜냐하면 관심이 없으니까 진상조사가 안 이뤄지고 진상조사가 이뤄지지 않으니까 또 관심이 더 없는.”
일본 법원에 북한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30일 관할권 관련 승소를 이끈 재일 한인 북송사업 피해자들은 감격과 함께 안쓰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2018년 소송을 처음 제기했을 때 원고로 함께했던 고정미 씨가 올 초 고독사했기 때문입니다.
가와사키 에이코 씨는 1일 VOA에 “아무도 그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홀로 쓸쓸하게 떠났다”고 전했습니다.
[녹취: 가와사키 씨] “고정미 씨가 건강이 좋지 못해서 초도시마란 곳에서 혼자 살았거든요. 고저 고독사했죠. 돌아가신 것도 (주위에서) 몰랐어요.”
고 씨는 과거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가 도쿄에서 개최한 공청회에 출석해 귀국자들이 북한에서 받은 인권 침해를 자세히 증언했으며 VOA와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돌아오지 못한 귀국자들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승소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습니다.
과거 VOA와 인터뷰했던 고정미 씨의 육성입니다.
[녹취: 고정미 씨] “북한 정권이 여기 조총련에 지시해서 공공연하게 사람들을 좋은 말로 속였잖아요. 지상낙원이라고. 3년 만에 돌아올 수 있다고, (북한에) 가 보니까 일본에서 겪는 차별 고통보다 더 심한. 째포요 반쪽발이요. 그것부터 시작해서 사상이 나쁘다. 뭐 조금만 이상한 소리 하면 어디로 갔는지 정치범수용소에 갔는지 죽었는지 행방불명되고….”
국군포로와 재일 북송사업 피해자, 납북자는 모두 유엔이 북한 정권의 강제실종 범죄 대상으로 분류한 대표적인 사례들입니다.
유엔 인권기구(OHCHR)는 지난 3월 발표한 북한 관련 강제실종 보고서(These wounds do not heal)’에서 이런 문제들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피해자와 가족의 고령화 문제를 지적했었습니다.
[유엔 인권기구 보고서] “Many of the victims, including relatives of forcibly disappeared persons, are very old, and many relatives of the disappeared have died without knowing the fate of their loved ones. This highlights the urgent need to clarify the fate of forcibly disappeared persons and provide a remedy to the families, including reunifications wherever possible.”
보고서는 “강제실종자 가족을 포함해 많은 피해자가 초고령이며, 실종자 가족 중 상당수가 사랑하는 사람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며 “이는 강제실종자들의 생사를 명확히 하고, 가능한 한 재결합을 포함해 가족들에게 구제책을 제공해야 할 시급한 필요성을 부각한다”고 밝혔습니다.
한국의 전후 납북자들은 국군포로 보다 상대적으로 젊어 사망자는 적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최성룡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이사장은 1일 VOA에 “납북 피해자 역시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돼 전후 납북자 517명의 절반가량이 숨지고 이곳(한국)의 가족도 속속 세상을 떠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최성룡 이사장] “매년 사람이 많이 돌아가시니까 굉장히 어떻게 할지. 세월이란 것은 속일 수 없으니까요. 북한에 240명 살아있다고 제가 북한 쪽에서 들었어요. 그래도 반절 정도는 살아 있는 거죠. 그러나 우리 (1977년 인천 송도에서 납북된) 이민교 학생의 어머니는 정말 소원이 아들 얼굴 한 번 보는 건데 희망이 자꾸 없어져요.”
최 이사장은 “그나마 한국과 미국 정부가 최근 이 문제에 관심을 보여 줘 감사하다”면서 지난달 줄리 터너 신임 북한인권특사를 면담한 뒤 “진정성을 느껴 희망이 더 생겼다”고 말했습니다.
터너 특사는 지난 18일 서울에서 최 이사장 등 납북자와 국군포로, 억류자 가족들을 만나 강제실종의 심각성에 우려를 표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해 해결책을 찾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터너 특사는 이틀 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이 개최한 행사 연설을 통해 가족들을 만난 소회를 밝히며 문제 해결을 위해 거듭 “한국 정부 당국자들과 긴밀히 협력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녹취: 터너 특사] “I did also have the opportunity to meet with family members of P.O.W.s, abductees and detainees in Seoul. It was very moving to hear their stories, but also inspiring to see their continued resilience and persistence and continuing to advocate for their loved ones. And I have made a commitment to do what I can to help address those issues as well.”
터너 특사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매우 감동적이었다”며 “회복력과 끈기를 잃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계속 옹호하는 모습에 큰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겠다고 거듭 약속했습니다.
앞서 정 박 국무부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도 지난 2월 서울을 방문해 납북자와 억류자, 국군포로 가족을 면담하는 등 서울을 방문하는 미 담당 관리들의 이런 행보가 정례화되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인권 전문가들은 의미 있는 진전이라며 긍정적 행보로 평가했습니다.
워싱턴의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의 그레그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납북자와 국군포로 문제 등은 당사자들의 고령화로 해결한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과 최근 미한일 협력 강화로 납북자 문제에 협력할 여지가 높아졌다는 점을 주요 배경으로 꼽았습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가 워싱턴의 이런 변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했습니다.
[녹취: 스칼라튜 총장] “I think that the Yoon Suk-yeol government in South Korea has played a leading role, a guiding role on trilateral coordination, also on resuscitating the issue of North Korean human rights at the United Nations. And I wouldn't be surprised to know that this is the result of the Yoon Suk-yeol government's stated interest in the issue.”
스칼라튜 총장은 “한국의 윤석열 정부가 미한일 3국 공조와 유엔에서의 북한 인권 문제 ‘소생’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면서 “이것이 윤석열 정부가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밝힌 관심의 결과라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로버트 킹 전 국무부 북한인권특사는 미국 정부가 강제실종 문제에 관해 입장을 얼마나 바꿨는지는 잘 모르겠다면서도 미 관리들의 움직임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터너 특사나 박 부차관보의 발언 중에 “특별히 중요하거나 주목할 만한 내용 또는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유용하다”는 것입니다.
[녹취: 킹 전 특사] “I don't have anything particularly significant or noteworthy or something that has been unsaid so far. But I think it's useful to raise the issue. I think that we have raised it on occasions in the past. If they raised it, I think it's a good thing. I think it would be a useful thing. I think the more attention that's given to it the, the more important it is.”
킹 전 특사는 “더 많은 관심이 주어질수록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런 공개적이고 잦은 언급이 “유용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신희석 법률분석관은 한국 정부가 “강제실종 문제에 대해 과거보다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면서 미국도 호응하는 분위기”라며 “적어도 관심 환기 차원에선 기존의 악순환이 선순환으로 변화하는 모습”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녹취: 신 법률분석관] “어떻게 보면 거꾸로 선순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쪽에서 정 박 부차관보라든가 터너 특사가 한국에 왔을 때 국군포로, 납북자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 국내에서 이슈화돼 관심도를 높여주는, 그리고 한미 정상회담에서 언급이 되는 게 이런 이슈에 대한 공론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최성용 이사장은 바이든 행정부가 좀 더 행동으로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줬으면 좋겠다며 “일본처럼 미 대통령이나 고위관리가 서울을 방문할 때 납북자 가족을 만난다면 큰 희망뿐 아니라 국민적 관심사도 꽤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면서 일본인 납북자 문제를 언급한 것처럼 한국인 납북자도 언급해 준다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녹취: 최성룡 이사장] “우리 한국 납북자도 거기에 넣어 달라, 그러면 대단한 압력도 되지만 또 우리 가족들도 기대를 걸죠. 아, 그래도 미국이 나서는구나.”
VOA는 이에 관해 국무부에 입장을 질의했지만 1일 오후 현재까지 입장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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