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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이슬람교의 시선에서 본 세계사 (3)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이슬람교의 시선에서 본 세계사 (3)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이슬람교의 시선에서 본 세계사 (3)

안녕하세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시간의 부지영입니다.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거의 매일 VOA 세계 뉴스를 통해 이들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뉴스를 듣고 계시지만, 왠지 먼 나라, 잘 모르는 나라로만 느끼실 겁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미국을 비롯한 서양 강대국들과 중동 이슬람 세력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드는데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슬람의 관점에서 세계 역사를 들여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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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초 마호메트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후, 아라비아 반도는 이슬람교 아래 통합을 이뤘다. 절대적인 존재였던 마호메트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자, 이슬람 교단에서 지도자를 선출했고 칼리프라고 불렀다. 정치와 종교의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던 칼리프 아래, 이슬람 세계는 점차 영토를 넓혀갔다. 제4대 칼리프 때 옴미아드 가가 무력으로 칼리프 자리를 차지한 후, 세습 칼리프 제도를 세웠고…… 옴미아드 왕조와 그 뒤를 이은 아바스 왕조를 거치면서, 이슬람 세계는 황금기를 누렸다.”

네, 하지만 영토가 커지면서 이슬람 제국은 분열하기 시작했습니다. 8세기 중반 아바스 왕조가 들어설 때, 쫓겨난 옴미아드 왕조의 일족이 이베리아 반도로 도망해서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서 칼리프 국을 세웠고요. 10세기 초반에는 마호메트의 딸 파티마의 후손이 이집트를 기반으로 새 왕조를 열었습니다.

//안사리 씨//
“스페인을 중심으로 한 나라, 이집트 카이로를 중심으로 한 나라, 또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나라……. 이렇게 3개의 칼리프 국가로 분열돼 있었습니다. 당시 메카와 메디나를 통제한 나라는 이집트 카이로에 기반을 뒀던 파티마 칼리프 국가였어요. 아바스 왕조 말기, 나라가 너무 커지면서 통합된 국가를 유지하기가 힘들게 됐고요. 지도층이 일반 시민들에게서 멀어지면서 현실 감각을 잃게 됐죠. 그런 가운데 북쪽 유목민들이 변방 지역을 공격했습니다. 이런 부족들이 이슬람 세계에 들어오면서 사회 질서가 무너지게 된 겁니다.”

아프가니스탄계 미국인 역사학자인 타밈 안사리 씨의 설명이었습니다. 안사리 씨는 당시 북방 유목부족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이 셀주크 투르크 족이었다고 지적하는데요. 이들은 페르시아를 지나, 예루살렘, 시리아, 이집트 일부를 포함해, 지중해 지역까지 진출했습니다.

//안사리 씨//
“투르크 족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슬람 세계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는 투르크 족 왕궁 경비원들이었는데요. 중앙 아시아 노예시장에서 어린 남자 아이들을 사서, 궁정에 데려다 길렀죠. 군사 훈련을 시키면서 말이죠. 그러니까 투르크 족 노예 병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수도 바그다드에서 살았고, 군사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권력을 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셀주크 투르크 족은 달랐습니다. 유목부족인 이들은 변방 도시를 공격해서 약탈하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이슬람 제국에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초기의 셀주크 투르크 제국은 늘 이동 중이었다고 역사학자 타밈 안사리 씨는 표현했는데요. 한 곳에 수도를 정하고 정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중앙집권적인 셀주크 투르크 제국은 2세대 내지 3세대가 지나서야 자리를 잡았습니다. 공식적으로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를 그대로 두긴 했지만, 칼리프는 종교적, 의례적인 자리에 지나지 않았고요.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적 권한은 술탄이 가졌습니다.

“서방의 기독교도들이여,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돈이 많은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근동의 기독교도들을 구원하는 일에 진군하자.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리라.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싸우다 쓰러지는 자는 죄 사함을 받을 것이다.”

1095년, 로마 가톨릭교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개최한 종교회의에서 이같이 연설했습니다. 당시 팔레스탄인 지역을 장악한 셀주크 투르크 족은 이슬람 교를 너무 열성적으로 믿은 나머지, 예루살렘을 찾는 기독교 순례자들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 그러니까 비잔틴 제국의 수도까지 위협했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교황이 성지 회복을 위해 군대를 일으키자고 촉구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편성된 군대가 바로 십자군이었는데요. 전쟁에 참여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지를 달았기 때문에 십자군이라고 불렀습니다.

//안사리 씨//
“이슬람 세계에서는 십자군을 프랑크 군이라고 불렀죠. 왜냐하면 십자군의 대부분이 독일과 프랑스에서 왔고, 게르만의 한 종족인 프랑크 족이었으니까요. 이슬람 인들은 십자군 병사들을 멀리서 온 무법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십자군이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행위를 일삼았으니까요. 사실 당시 중동의 도시 국가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너무 바빴기 때문에, 십자군을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들 전쟁에 이용하려고 했죠. 그 당시 중동의 도시국가들에게 적은 다른 도시국가를 다스리는 친척들이었지, 십자군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셀주크 투르크 제국은 분열 상태에 있었는데요. 중앙집권적인 제국을 유지한 것은 잠시뿐이었고요. 각 지방의 총독으로 나가있던 친척들이 세력을 키우면서, 각각 독립국가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자, 이슬람 세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예루살렘은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유대교, 이슬람교에게도 성지였던 것이다. 이슬람 교도들에게 예루살렘은 마호메트가 천국을 구경한 성지였다. 이슬람 교도들은 마호메트가 천사 가브리엘의 인도로 예루살렘으로 날아가, 이전의 선지자들을 만났다고 믿고 있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하늘로 들어올려져, 천국을 구경하고 돌아왔다고 믿었던 것이다.”

십자군은 예루살렘 정복과정에서 유대교도들과 이슬람 교도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습니다. 예루살렘 함락이 준 충격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세계가 단합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는데요. 12세기말 이슬람 세계는 살라딘의 지휘 아래 예루살렘을 되찾는데 성공했습니다.

십자군 원정은 1096년부터 1272년까지 약 2백 년 동안 모두 8차례 일어났는데요. 제1차 원정 때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십자군 왕국을 건설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원정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일부 서양 학자들은 십자군 전쟁이 유럽에게는 도약의 발판, 이슬람에게는 쇠퇴의 계기가 됐다는 지적을 하기도 하는데요. ‘방해 받은 운명: 이슬람 교도의 시각에서 바라본 세계사’의 저자인 역사학자 타밈 안사리 씨의 생각은 다릅니다.

//타밈 안사리 씨//
“십자군 전쟁은 지중해 주변의 좁은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나머지 이슬람 세계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못했죠. 사실 십자군은 메카나 또 메디나 같이 아라비아 반도의 중심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홍해 주변까지 내려간 적이 있긴 하지만, 금방 다들 체포됐고요. 바그다드나 카이로에 이르진 못했죠.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계에서 그렇게 큰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더 큰 재앙은 좀 더 뒤에 일어났는데요. 13세기 초 몽골의 침략이었습니다

“칭기즈칸과 그의 후손들이 세계를 흔들자 술탄들이 쓰러졌다. 칼리프들이 넘어졌고, 카이사르들은 왕좌에서 떨었다.”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중에서)

네, 12세기 중반 현재의 몽골과 시베리아가 맞닿는 곳에서 테무진이란 사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는 나중에 ‘세계의 왕’이란 의미의 ‘칭기즈칸’이라고 불리게 되는데요. 중국 금 나라를 쳐서 베이징에 입성하고, 서역 정벌에 나서 중동을 위협했습니다.

몽골 군의 파괴력은 대단했습니다. 이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폐허가 됐는데요. 페르시아를 공격했을 때는 지하 수로를 파괴해서, 한 때 풍요로운 땅이었던 이란 서부와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을 사막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칭키즈칸은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었던 바그다드에 이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요. 그 일은 손자 훌라구가 이루게 됩니다.

“훌라구는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에게 편지를 보냈다. 순순히 나와 항복하지 않으면,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고, 도시 전체를 불태울 것이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던 칼리프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훌라구를 애송이라고 얕잡아 봤던 것이다. 훌라구가 아무리 뛰어난 전략을 갖고 있고,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도, 하늘의 별을 딸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몽골 군의 바그다드 공격은 1258년 2월 3일에 시작됐습니다. 그리고17일만인 2월 20일, 바그다드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아예 바그다드란 도시 자체가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요.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훌라구가 지킨 것입니다.

훌라구는 당시 프랑스 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20만 명을 살해했다고 으스댔지만, 이슬람 측 통계를 보면 80만 명이 몽골 군에게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어느 쪽 통계가 맞든 끔찍한 살상이 벌어진 것은 분명한 일인데요. 몽골 군의 파괴행위는 사람을 죽이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타밈 안사리 씨//
“몽골 군은 이슬람의 주요 도시들을 파괴했습니다. 1258년의 바그다드 공격이 절정이었죠. 완전히 도시 전체를 쑥밭으로 만들어버렸죠. 바그다드 도서관이 보관하고 있던 중요한 문서와 서적을 모두 불태워버렸는데요. 앞서 이슬람 황금기의 귀중한 지적 유산들이 모두 잿더미가 된 것입니다. 또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인 발흐에도 중요한 도서관이 있었는데, 이 도서관 또한 완전히 파괴됐습니다. 파괴력 면에서 십자군과 몽골 군의 침략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역사학자 타밈 안사리 씨는 몽골 족이 맹렬한 기세로 이슬람 세계를 정복했지만, 결국에는 이슬람 교도들이 몽골 족을 다시 정복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이슬람이 영토는 점령당했지만 문화적, 종교적으로는 오히려 영향을 끼치면서, 몽골 족 지도자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했기 때문입니다.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이슬람의 시각에서 바라본 세계사를 전해 드리고 있는데요. 이에 관한 얘기는 다음 시간에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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